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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한양도성 ③ 혜화문~낙산공원~흥인지문~광희문 구간

by 즐풍 2024. 1. 28.

2023_148

 

 

2023. 9. 19. (화) 07:43~18:57(9시간 6분 순성, 휴식 2시간 8분 포함) 22.7km 순성

                     낙산 구간 13:25~16:00(2시간 35분, 한성도성박물관, 동대문역사관 관람 포함) 4.6km

 

 

서울 한양도성을 순성 시 인왕산과 백악산을 먼저 끝내며 가장 어려운 구간을 털어냈다.

편의상 3구간에 해당하는 낙산은 가장 낮은 산이라 산책하듯 순성 하기 좋다.

이 구간에서는 한성도성박물관과 동대문역사관을 별도로 관람했기에 백악산 구간만큼 시간이 걸렸다.

박물관이나 역사관을 관람하면 한양도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만큼 둘러보는 게 좋다.

한양도성박물관과 동대문역사관 역시 별도로 포스팅하고자 한다.

 

 

한양도성 순성코스와 낙산구간 코스

 

 

백악산 구간의 끝에 있는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를 나오면 바로 혜화문을 만난다.

혜화문은 백악산 구간의 끝이자 낙산구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혜화문과 연결된 성벽을 따라 들어간다.

 

 

 

한양도성의 성문을 비롯해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수원화성 등 모든 성문의 편액은 밖에 걸린다.

성 안으로 들어갈 때 어느 곳을 통하는지 알려주문 문패인 셈이다.

옛날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 또는 위에서 아래로 세로 쓰기를 했다.

지금처럼 가로 쓰기의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낙산 구간 Naksan Section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Hyehwamun to Heunginjimun

 

혜화문에서 낙산駱山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산이라 하며 낙타산駱駝山 혹은 타락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124.4m).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면 시기별로 달라진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수마을, 이화마을 등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성곽마을도 둘러볼 수 있다.

 

This section begins at Hyehwamun (Gate), crosses over Naksan (Mountain) and ends at Heunginjimun (Gate).

Naksan stood on the eastern side of the capital, thus it represented the guardian spirit of the eastern quadrant.

It is the lowest (124.4m) of the four inner mountains.

The wall-side hiking trail outside the Catholic University campus passes by various types of wall construction employed over the years, providing hikers with an opportunity to compare. In addition, the Jangsu and Ihwa communities maintain the atmosphere of the old "wall-side community" that once thrived here.  (안내문)

 

 

 

혜화문 惠化門  Hyehwamun Gate   

시대: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의 동북쪽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으나 1511년 (중종 6)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조 때에는 없던 문루를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에 본래보다 북쪽으로 옮긴 자리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었다.

 

Hyehwamun is the north-east gate, one of the four small gates in the wall.

It was originally called Honghwamun when it was built in 1396, but was renamed Hyehwamun in 1511.

The gate pavilion was demolished in 1928, followed by Hongye (stone archway) in 1938.

Hyehwamun was rebuilt at its present location in 1994, slightly further north from its original site.

 

惠化门是汉阳都城八个城门中朝东北的小门。门機于1928年、虹覽(拱形门洞)

于1938年被拆除,1994年在原处北边重建。(안내문)

 

 

 

성벽을 보면 여러 시대에 걸쳐 복원되고, 새로 쌓으며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

 

성 밖으로 걸으며 보는 풍경은 단조로운 편이다.

성 안에서 보는 풍경은 더 머리 조망할 수 있으나 성 밖은 주변 건물에 가려 조망도 좁다.

 

 

 

이곳은 여장만 추가로 올리며 성벽을 높인 곳이다.

 

 

 

 

도성의 안과 밖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도성 안의 호수는 1만 7천15호,

성벽 바깥 10리 이내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호수는 1천7백79호였다.

성저십리의 면적이 도성 안보다 5배 이상 넓었으나 인구는 1/10에 불과했다.

성저십리의 행정도 한성부가 담당했지만, 성벽은 그 안과 밖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누었다.

도성 안은 왕실과 국가의 존립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도성 주민은 조세, 공물, 요역을 모두 면제받았다.

대신 도성 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국가의 지휘에 따라 일상생활을 조직할 의무를 졌다.

성문이 닫히면 도성 안에서는 남자들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문루에서 화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불을 끄러 나와야 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거나 군인·공장工匠으로  불려 올 때,

혹은 도성 안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공급할 때에나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이 경계선의 기능을 잃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성 안에 산다'는 말에는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안내문)

 

 

 

 

최근에 복원한 구간은 벽돌 블록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성벽을 수리하는 모형

 

△▽ 한양도성박물관 자료

 

야장冶匠 : 망치나 끌, 정을 만드는 대장장이

장조역: 어른 일꾼, 아조역: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애

화정火丁: 쇠를 녹일 때 불을 다루는 장정, 방역坊役 : 거푸집 만드는 일꾼

 

 

 

 

 

 

 

어렵지 않게 낙산공원의 정상으로 오른다.

낙산공원이나 남산공원 정상 모두 차량이 진입할 수 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Inscribed Stones in the Fortress Wall of Hanyang (currently Seoul)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충청도의 음생현(지금의 충북 음성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는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다시 올라와 쌓게 했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9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Inscribed Stones stand for pieces of stones engraved with records related to fortification.

The Inscribed Stones in this section of the fortress wall are stone pieces engraved with the starting point of fortification of the section by the people of Eumseong-hyeon of Chungcheong-do(currently Eumseong-gun, Chungcheongbuk-do).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names of provinces were engraved on the stones; when a section of the fortress wall collapsed, people of the province of the section were forced to come to Hanyang and build the section again. The Inscribed Stones remaining in the Fortress Wall of Hanyang are classified into those engraved with fortification sections with primers of Chinese characters (14th century), names of the provinces of which people built the section (15th century), and the provinces' officials and stone masons for the sections (18th century and thereafter). Some 290 pieces of the Inscribed Stones of various periods and types remain in the fortress wall of Seoul. (안내문)

 

 

 

한양도성을 매년 분기마다 순성 하며 지정된 장소에서 사진을 찍은 걸 기준으로

실제로 순성 했다는 게 인증되면 한양도성 메탈 배지를 받게 된다.

카메라가 무거워 고릴라 삼각대에 핸드폰을 끼워 사진을 찍었다.

 

이제부터 낙산공원의 도성은 성 안으로 순성 한다.

거의 마지막 구간에 있는 서울디자인센터에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벽 주변에는 카페가 많이 들어섰다.

 

성 안과 밖의 높이 차이가 눈에 보인다.

 

 

 

오른쪽 건물이 서울디자인센터 건물이다.

 

한양도성박물관은 이 건물의 1층에서 3층까지 일부 구간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흥인지문으로 이동한다.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내용은 별도로 포스팅한다.

 

강아지풀이 억새처럼 보인다. 

 

드디어 흥인지문이 보이니 낙산구간도 끝나간다. 흥인지문을 거쳐 광희문까지 포스팅한다.

 

흥인지문 옆 성벽에는 성벽이 파괴되면서 남은 각자성석을 모아 성벽으로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성벽이 헐리거나 근대화 과정에서 도로를 내며 헐렸다.

이 각자 성석을 그중에 남아 있는 것을 이렇게 성벽으로 살린 것이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Inscribed Stone in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汉阳都城的刻字城石 

 

訓局 策應兼督役將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全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 都邊首

吳有善一牌邊首 梁大吳 二牌邊首 黄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 四月

 

한필영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전수선 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 도편수 오유선 일패 편수 양육오 이패 편수

황승선 삼패 편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 사 월 일 개축

 

Hunguk chaegeunggyeomdogyeomjangsibin sa

hanpiryeong ilpaejang jeolchung seongsegak ipaeiang jeolchung jeonsuseon sampaeiang sagwa yujehan seoksu dopyeonsu oyuseon ilpae pyeonsu yangyugo ipae pyeonsu hwangseungseon sampae

pyeonsu gimjeongnip ganghuisasibonyeon sawol il gaechak

 

训局 策应兼督役将+人 使 韩粥菜一牌将

折冲成世珏二牌将 折冲 全守善三牌将 司果 刘济汉 石手 都边首 吴有善一牌边首 梁大吴 二牌边首 黄承善

三牌 边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 四月 日 改筑1訓局 策應兼督役将十人 使 韓弼栄一牌将折衝 成世珏 二牌将

折衝 全守善 三牌将 司果 劉济漢 石手 都邊首 具有善 一牌邊首 梁六昊 二牌邊首 黄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 四月 日改築)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32년(1706) 4월에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구간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G)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안내문)

 

 

 

이간수문 二間水門

을지로 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광희문으로 가는 길에 만난 동대문 역사관으로 들어선다. 이곳 역시 별도로 포스팅할 예정이다.

 

조선시대 성 안에 있었던 우물에 소나무 두 그루가 친구로 남아 있다.

 

 

ㅁ 광희문光熙門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문루 가 소실되었으나 1975년 원 위치에 15m 떨어진 현 위치로 옮기고 문루를 복원하였다. (안내문)

 

 

광희문 성지 Gwanghuimun Shrine

 

광희문은 1396년 한양 도성을 창건할 때 세운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위치한 4소문 중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소문과 함께 한양 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 사용되어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박해시기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순교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광희문 밖은 단순히 조선의 죄수와 무연고자들의 시신이 방치되었던 곳이 아닌 순교자들의 주검과 피를 통해

성화된 중요한 성지라 할 수 있다.

광희문은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었다가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다.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졌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는

남한산성의 수구문이 있다.

 

Gwanghuimun Gate has been one of the four auxiliary gates since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was constructed in 1396.

It was also called the 'gate of the dead' along with Seosomun Gate because dead bodies were carried through the gate.

During the persecution period, many Catholics around Seoul, Suwon, and Yong-in were arrested and transferred to Hanyangdoseong.

They were forced to give up their faith but they refused to do so and were martyred.

The bodies of the martyrs were treated worse than a piece of luggage and were dumped outside Gwanghuimun,

so this place was a crossroads between life and death. In that sense,

this site is considered an important holy place sanctified through the bodies and blood of martyrs.

Gwanghuimun Gate was restored through historical research in 1976 after the gate tower

and the upper wall of the fortress gate were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The gate was moved to the south as a new road was opened.

Another representative gate of the dead is located in Namhansanseong Fortress.  (안내문)

 

 

 

한양도성을 순성 하며, 윤동주 문학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한양도성 박물관, 동대문 역사관은 물론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까지 둘러봤다.

광희문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네 시다.

낮이 제일 길다는 하지가 지난 지 벌써 세 달이나 되다 보니 제법 길던 해도 짧아졌다.

어쩌면 남산구간을 순성 할 땐 해가 지는 밤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