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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서울 한양도성 ③ 혜화문~낙산공원~흥인지문~광희문 구간

by 즐풍 2024. 1. 10.

2023_109

 

 

2023.7.5. (수)  09:00~10:35, 1시간 30분 탐방

 

 

서울 한양도성 2일 차 탐방은 첫날에 돌지 못한 와룡공원부터 시작해 나머지 전구간을 돌게 된다.

일산백병원을 마지막으로 다녀오며 시작한 한양도성은 뜻밖의 흥미를 유발한다.

조선의 수도로 시작해 지금까지 600여 년을 버텨온 근간의 힘은 한양도성에 있다.

조선에서 사대문 안, 그러니까 한양도성 안에는 왕가는 물론 관료들과 양반이 사는 곳이었다.

 

1970년대 강남을 개발하면서 조선의 사대문은 더 이상 맥을 못 추고 변방이던 강남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랬던 강남도 집값 상승에 따른 대출금 옥죄기 등으로 가장 늦게까지 버티더니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강남이 아무리 집값이 오른다고 해도 여전히 사대문 안 명당엔 내로라하는 갑부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썩어도 준치라고 사대문 안에 산다는 건 여전히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 포스팅을 수정할 게 있어 수정한 다음 비공개로 걸었나 보다.

이번엔 정리하면 알게 되어 공개처리하다 보니 현재 시각으로 올리게 되어 철 지난 포스팅이 된다.

 

 

 

ㅁ 한양도성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도성의 축조는 백악·인왕·목멱(남산)·낙산을 연결하는 선상에 이루어졌으며

‘서울성곽복원위원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양도성의 전체둘레는 18,127m이며,

이 중 복원된 구간이 10,467m 멸실되어 복원 불가능 구간이 5,140m,

복원 가능한 구간이 2,520m로 파악되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과 종묘, 사직등 왕실 건물과 의정부, 육조 등 관청건물, 양반과 서민들의

주거지가 정해진 위치에 세워진 계획도시이다.

출입시설인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季成桂)는 즉위 3년(1394) 10월에 한양천도를 단행하고,

뒤이어 궁궐, 관아, 성곽 등 여러 시설을 갖추었다.

 

수도의 방위를 목적으로 축조된 도성은 태조 5년(1396) 1월부터 축조하여 태조 7년(1398) 완공했다.

성곽의 축조는 59,500척의 성터를 1구간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어서 축성하되 2개의 구간마다

판사·부판사 각 1명씩과 사·부사·판관 등 12명이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자를 두어 책임을 분리시키는 등 세밀한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각 구간마다 번호를 매겼는데 천자문 순서대로 백악산 동쪽의 제1구간을 ‘천(天)’자로부터 시작하여

‘지(地)’자·‘현(玄)’자 순으로 하였다.

59,500척의 전체의 성터는 천자문의 ‘천’에서 순서대로 하여 97번째인 ‘적’(吊)' 자에서 끝나고 있다.
1396년 1월 9일부터 시작한 축성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는 총 118,049명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의 총인구를 약 300만 명으로 추정했을 경우에 4%에 육박하는 인원이다.

서울 성곽의 공사는 이처럼 대규모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왕실이 한양도성의 축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혜화문 

 

한양도성의 동북쪽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으나 1511년 (중종 6)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조 때에는 없던 문루를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년에 헐렸는데, 1994년에 본래보다 북쪽으로 옮긴 자리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었다.

                                                                                     (안내문)

 

 

 

600여 년 간 서울의 울타리 역할을 한 한양도성은 도성민의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보신각 종루에 매달린 큰 종을 쳐서 성문 여닫는 시각을 알렸는데, 새벽에는 33번, 저녁에는 28번을 쳤다.

새벽에 치는 종을 바라(파루), 저녁에 치는 종을 인경(인정)이라 했는데,

민가의 대문도 이 종소리에 따라 열리고 닫혔으니 성문의 개폐 시각이 도성민의 생활 리듬을 지배한 셈이다.

한양도성은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하였다.

왕이든 백성이든 생을 마감하면 반드시 도성 밖에 묻혀야 했으니, 서울 사람들에게 도성은 삶의 증표와 같았다.

먼 곳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 한양도성은 반가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온 이들이었으니 먼발치에서 한양도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드디어 한양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나 과거시험을 보러 상경하는 선비들의 경우, 저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밤낮으로 책을 읽었으니

한양도성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거 보러 온 선비들 중에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비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도성민들에게도 전해져 ‘순성놀이’라는 놀이가 생겼다.

정조 때 학자인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아들인 유본예(1777∼1842년)도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봄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적었다.

한양도성은 일차적으로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였으나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구실도 하였다.

도성 안에서는 채석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모두 성 밖에서 조달해야 하였다.

성벽은 비록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의 능선 위에 쌓였으나,

그 돌들은 북한산과 아차산 등지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한양도성은 이렇게 내사산과 외사산을 연결하고,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통합하였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도성방위체계를 완성하였다. 한양도성은 방어 시설로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침 시에는 물론 내란 때에도 도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도성을 버리고 힘없는 백성만 남아 고초를 겪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애써 성을 쌓아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불평이 나올 만도 하였다.

영조 27년(1751) 9월 11일, 왕은 “도성을 지키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먼저 성 위에 올라 백성과 함께 싸우겠다.”는 내용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반포하여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더불어 도성민들에게 각각 담당 구역을 정해주고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고 맡은 구역을 지키게 하였다.

도성민을 주체로 하는 도성방위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출처_한양도성)

 

 

 

 

도성의 돌 크기
숙종 40cm×40cm×80cm‧순조 60cm×60cm×120cm

 

성곽이 처음 세워진 태조 때는 크고 작은 편마암을 자연형태 그대로 맞춰가며 돌을 쌓았다.

세종 때는 긴 네모꼴로 다듬은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면서,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다.

숙종 때에는 40cm x 40cm 정도의 면석을 잘 다듬어서 마치 조각보처럼 치밀하게 모접기방식으로 쌓았다.

순조 때에는 60cm x 60cm 정도로 면석을 크게 다듬어 보다 균일한 격자형 패턴으로 쌓았다.

한양도성은 시기별로 이렇게 성돌 모양과 크기, 축조기법이 다르다.

아울러 272개의 각자성석(축성에 동원된 지역과 담당자 이름을 새긴 돌)이 발견되었는데,

성벽을 짓고 수리하는데 참여한 지역과 군대, 감독‧관리를 맡은 감관과 기술자 변수, 시기 등이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출처_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송인호 교수)

 

성벽 위 여장은 최근 복원하면서 완벽한 형태를 갖추었다.

총구를 멀리 쏘고 가깝게 쏘는 원총안, 근총안이 별도로 마련되었다.

 

성돌은 성벽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성을 쌓거나 개축할 때마다 시기가 다르니 성돌을 보고 시기를 알 수 있다.

 

공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이중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었고 책임자와 감독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성벽 외측 석면에 감독자의 성명, 군명(郡名), 자호(字號)둥을 새겼는데

지금도 태조 때의 석축인 남산동 측 성벽에는 경상도 구역의 표시인 ‘곤자육백척(崑字大百尺)’,

‘검자육백척劍刻字穴百尺)’ 등의 문자가 남아있고 낙산구역에도 결성(結城), 동복(同福)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영동(永同)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충청도의 영동현(지금의 충북 영동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는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올라와 다시 쌓게 했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G),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영동(永同) 각자는 세월이 오래 지남에 따라 풍화되어 희미하다.

이 글자는 탁본을 떠야 더 자세한 글자를 알아낼 수 있다.

 

 

 

아래에 있는 긴 돌은 위 성돌을 여섯 개나 받치고 있다.

이렇게 긴 돌을 쌓으면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지만 균형이 맞지 않으면 돌이 깨지기 쉽다.

여전히 위에 있는 성돌의 무게를 지탱하는 걸 보면 균형을 맞춰 잘 쌓은 것이다.

 

 

도성의 관리와 생활

 

도성은 왕의 존엄과 나라의 권위를 표상하고 수호하는 시설로서 그에 걸맞은 권위를 지녀야 했다. 

세종 대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성벽을 따라 안팎으로 순심로(巡審路)를 내었는데, 

군사들이 매일 이 길을 다니며 이상 유무를 관찰하고 이상이 발견되면 담당 관서에 알려 보수하게 했다. 

왕과 외국 사신들이 자주 드나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특히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었으며, 

문루는 화재 감시용 망루 역할도 했다. 

도성은 서울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직접 강력히 규제했을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백성에게도 상징적, 

실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울 주민들은 도성 문이 여닫히는 시각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했으며, 매일 성벽을 보고 살았다. 

영조 대 '수성절목(守城節目)'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든 도성민에게 유사시 달려가 지켜야 할 성벽 구간이 할당되었다. 

지방에서 상경上京하는 사람들은 성벽과 성문을 보고 서울을 인지했다.

                                                                                              (출처_한양도성)

 

 

 

 

성 쌓기

 

축성 공사는 성 쌓을 자리의 땅을 다지는 지정(地定)에서 시작된다.
바닥이 흙인 경우에는 땅을 깊이 파서 나무말뚝을 박거나 잔돌을 넣어 다지고, 

암반인 경우에는 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평평하게 다듬었다.
땅이 다져지면 바깥쪽으로 지댓돌을 놓았는데, 빗물에 파여 나가지 않도록 그 앞을 평평한 돌로 덮기도 했다. 

지댓돌 위에 평평한 자연석이나 네모지게 가공한 돌들을 쌓아 올리고 그 뒤를 잔돌과 흙으로 채우는 

공정을 반복하여 체성 (體城)을 만들었다.

체성 위에는 여장 (女裝)을 쌓고 옥개석을 덮었다.

축성 공사에서 큰 비중을 점한 것은 돌을 뜨는 채석(採石)과 돌을 다듬는 치석(治石)이다.

태조와 세종 때에는 공사장 인근에서 이 일들이 이루어졌으나 숙종 때에는 도성 밖 먼 곳에서 돌을 떠

산 능선까지 운반하는 고된 노동이 부가되었다.   (출처_한양도성)

 

 

 

낙산 구간의 성 밖에서 암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왔다.

성 밖의 성벽 높이는 대략 4m 정도로 제법 높은 편이나 안쪽은 허리에서 가슴 정도의 높이다.

 

 

성 밖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해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본의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 오염처리수 해양 방출과

관련해 나라는 둘로 쪼개지며 극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거기다 서울~양평 간 고속도로가 놓이는 마지막 지점에 대통령 처가의 땅이 들어가며 얻게 되는

수익을 놓고 연일 상대방을 맹비난하기 바쁘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귀결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처사다.

 

 

낙산공원


장수마을에서 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이 나타난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 불릴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백악과 인왕산에서 서울의 원경이 보인다면, 이곳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도심을 느낄 수 있다.

                                                                                                     (출처_한양도성)

 

이곳의 성벽은 길부터 높이를 재면 6~8m로 비교적 높다.

그러나 성 안에서는 가슴 높이 정도라 산성의 기능을 톡톡히 한다.

 

 

한양도성을 탐방하면서  「순성巡城하다」는 '성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다'는 뜻이란 걸 알게 되었다.

즐풍은 지금까지 탐방한다는 말을 주로 써 왔는데, 한양도성이나 읍성, 산성을 탐방할 때 

이제부터는 옛날부터 써 온 순성이란 단어를 사용해야겠다.

한양도성에 대한 스탬프 투어를 분기별로 네 번을 다 돌고 인증사진까지 찍어서 제출하면

특별한 배지를 받는다고 한다.

올해는 벌써 끝난 상반기 두 개를 받을 수 없어 굳이 인증사진을 찍을 필요는 없지만

내년에도 이런 분기별 스탬프 투어가 있다면 미리 인증 장소를 알아 두어야 한다.

다른 세 곳의 장소는 찾기 쉬운데, 낙산의 정상 어느 곳이 인증 장소인지 몰라 담당부서에 전화했더니

성 안쪽 낙산정(駱山亭)이 인증장소라고 한다.

인증 장소로 떠나며 안내 지도에서 본 '홍덕이발'이 왜 안내 지도에 표기될 이유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홍덕이밭'이란 걸 알고 실소를 참지 못했다.

건성으로 글을 읽다 보니 엉뚱하게 잘못 읽은 것이다.

 

홍덕이밭


낙산 아래 동숭동에 있던 밭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심양에 있을 때 따라가 모시던 나인 홍덕이라는 여인이 심양에 있으면서 

채소를 가꾸어 김치를 담가서 효종에게 날마다 드렸는데 볼모에서 풀려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 흥덕이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이에 효종은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대게 했다 하여 낙산에 "홍덕이 발"이라는 지명이 전해진다. (안내문)

 

홍덕이밭 안내문을 보면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갈 때 의복 담당, 식사 담당 등 나인을 데려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귀국 후 홍덕이 나인은 낙산 중턱에 채소밭을 얻었는데, 지금 이 토지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궁금하다.

후손이 있다면 조선실록 등 자료를 찾아 소유권을 주장해도 될까?

 

홍덕이밭과 가까운 곳의 낙산정

 

 

 

성 안쪽 마을길을 따라 몇 개의 카페가 보인다.

산자락에 집을 지어 규모는 작지만, 탐방객을 위해 영업을 한다.

 

그런 카페 한 군데는 이렇게 운치 있는 작품을 걸어놓아 지나가는 사람들 마음을 감동시킨다.

 

한양도성과 가까운 성 안쪽에 큰 먼물을 짓기는 어렵겠지만 성 밖은 사정이 다르다.

한양도성과 조금 떨어진 곳은 크게 높지 않아도 3~5층 정도 높이의 건물은 지을 수 있겠다.

 

 

 

 

한양도성을 쌓고 이 도성을 전쟁에 사용한 기록은 거의 없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꽁무니가 빠지게 압록강으로 도망가 언제든 명나라에 귀순할 생각이었다.

왕이 이렇게 양아치나 다름없이 도망치니 백성들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압록강변에서도 명으로 들어가겠다는 걸 유성룡 등 신하가 말려 겨우 강변에 머무르는 정도였다.

왜놈들은 파죽지세로 한양에 들어와 온갖 약탈과 살육을 벌었다.

무능한 정권에 죽어나는 건 백성들이다.

다행히 남해안에서 이순신 장군이 굳건히 지키는 바람에 식량을 지킬 수 있어 나라를 구했다.

체면이 땅에 떨어진 선조는 인기 높은 이순신은 눈에 가시였다.

여러 죄목을 씌웠으나 죽이지 못해 백의종군시킨 선조는 지질한 허수아비 왕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카시아 나무라고 하는 데, 자세히 보지 않았어도 아카시아는 아닌 거 같다.

 

 

동서남북의 대문과 이력 -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한양도성은 백악・낙산・목멱・인왕의 사산과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다.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 숭례문은 수도 한양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1398년에 완공되었는데, 1448년에 중건하였다가 1479년에 다시 개축했다.

2008년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2013년에 복구되었다.

동쪽 대문 흥인지문은 1396년에 창건되었는데, 1868년에 낮은 지반을 높이는 토목공사와 함께 중건됐다.

서쪽 대문 돈의문은 전차노선이 복선화 되면서 1915년에 철거되었고,

북쪽 대문 숙정문은 암문(성벽에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 형태로 남아있었는데 1976년에 수리하고

그 위에 문루를 새로 세웠다.

고려시대부터 개경과 남경을 잇는 길에 세워진 북서쪽 소문인 창의문은 인조반정을 거친 후 1742년에 중건되었다.

남동쪽 소문 광희문은 1975년에 도로 확장과 함께 남쪽으로 이축되었으며,

북동쪽 혜화문은 1939년 전차 부설과 함께 철거되었다가, 1994년 북쪽으로 옮겨 새로 건설했다.

남서쪽 소문소의문은 도로 정비와 함께 1914년에 철거됐다.

이렇듯 각 대문들은 오백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조선왕조 수도 한양의 역사와 20세기 근대의 역사를 함께 보여준다.

                                                                 (출처_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송인호 교수)

 

 

흥인지문(興仁之門)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출처_한양도성)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숙종 32년(1706) 4월에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구간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쌓았다는 기록이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G)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ㅁ 흥인문興仁門

 

흥인문興仁門은 서울 도성 안을 남과 북으로 나누는 청계천 물줄기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오간수문五間水門 바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지형 상으로 볼 때 서울 도성 내에서 가장 낮은 곳이 된다. 

사람은 일상생활의 활동 반경에서 있어서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높은 곳으로 나간다. 

자기 자신의 하루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 그날 일과의 출발점이 되어 가장 낮은 곳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역설적으로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된다. 

그리고 땅과 물이 만나는 곳 또한 인류 생활의 가장 낮은 곳으로 많은 물산과 인간이 교통 하는 곳이 된다. 

여기서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인(사랑)을 불러일으켜 인간생활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흥인문의 상징은

 우리로 하여금 낮고 모자란 것을 비보하여 평화로운 도성 안의 주민생활을 보장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가장 먼저 점령당한 도성 문이 되니, 여기서 얻어질 역사적 교훈도 

오늘날의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냉철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_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문)

 

 

이간수문 二間水門

을지로 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첫날 인왕산과 북악산을 오를 땐 모자가 젖을 만큼 더워 땀을 훔친 손수건이 다 젖었다.

오늘은 비가 온 다음 날이라 그런지 땅의 열기가 식어 바람이 불 땐 시원하다는 느낌이 든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은 것도 한두 번에 지나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다.

덕분에 마지막 날 한양도성 순성은 순조롭게 끝난다.

나머지 남산구간도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