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130
2022.7.10 (일) 10:35~11:15, 1시간 10분 탐방
남포읍성과 보령읍성 탐방을 끝내고 보령 지역 읍성의 백미인 충청수영성에 도착했다.
작년에 여수 돌산도에 6개월 체류하면서 여수의 전라 좌수영과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을 탐방했다.
해남의 전라 우수영과 부산의 경상 좌수영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탐방 전이다.
임진왜란 중에 수군 전체를 총괄하며 일사분란한 통제를 위해 충청,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통합하여 통영에 설치했다.
이른바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초대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했으며, 오늘날 통영의 명칭도 이 통제영에서 시작된 것이다.
삼도수군 통제영으로 통합 운영되었다고 해도 충청수영성이 단박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중에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통합되었다고 해도 서해는 서해대로 여전히 수군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세곡을 싣고 한양으로 가던 조운선을 보호하거나 왜구의 침탈을 방지하는 등의 임무는 계속된 것이다.
이런 충청수영성은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다고 한다.
□ 보령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돌로 높이 쌓아 올린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城)으로 자라(鱉) 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 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으며,
오천항(鰲川港)은 백제 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다.
세조 12년(1466년) 수영(水營)을 설치, 충청 수군의 최고 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충청수영성은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 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다.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 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 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 : 보령시청, 문화재청]
보령의 충청수영성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풍경이다.
홍예문 위로 문루가 있었는지 몰라도 옆에 고목의 나뭇가지가 뻗은 크기로 봐 대한제국 이후엔 없었던 것 같다.
드라마는 안 보니 내용이나 인기는 어땠는지...
바로 앞에 주차 공간이 있어 쉽게 모셔 놓고 수영성으로 들어간다.
충청수영 진휼청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 객사와 삼문만 남아 있다.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이 있다.
충청수영 고지도 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성벽으로 잘 큰 고목은 멀리서 봐도 보기 좋다.
건물과 성벽뿐만 아니라 이런 고목도 문화재가 갖는 역사성을 한몫 거든다.
서문인 망화문(望華門)
성 안에는 여러 관아 건축물들과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망화문은 홍예(무지개) 문으로 만들었다.
충청수영성 아래에 있는 바닷가는 오천항이다.
충청수영성의 군선도 아마 이 어딘가에 유사시 대비를 위해 정박했을 것이다.
영보정(永保亭)
영보정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여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 시대의 많은 묵객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남겼다.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도(永保亭圖)가 전해온다.
(안내문)
이 안내문을 설치한 이후 2005년 영보정을 복원했다.
안내문에 복원 결과에 따라 문구를 보완해야 하는데, 아직 그대로 있다.
담당과 통화하여 이 부분은 수정하기로 했다.
영보정 안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천상누대화중강산(天上樓臺畵中江山)은 천상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영보정 예찬 글을 편액에 걸어 놓은 게 많다.
박은, 이안눌, 하백원, 심지어 정약용의 안유기까지 걸려 있다.
대들보가 드러난 천장
사방이 시원하게 노출된 정자로 겨울 한철만 앉아 있기 힘들지
나머지 계절은 이곳에서 경치를 바라보며 한담을 나누고 풍경 예찬을 글을 남기기 좋겠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건물 뒤에서 잡은 영보정
영보정을 지나 충청수영성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려고 장교청으로 가는 길에 보는 공덕비
밖에서 보는 장교청(객사)
장교청을 끝으로 본격적으로 수영성 외곽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장교청과 오른쪽 멀리 영보정이 보인다.
이 돌문은 누군가 심심풀이로 쌓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성안에 있는 데 성과 연결되지도 않았고, 굳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이곳에서 석성은 끝나고 토성으로 연결된다.
충청수영성이 해상을 지키는 해군 기지로 혹여 해상에서 올라온 왜구가 있으면
주요 격전기가 바다 쪽이라 육지의 안쪽인 이곳은 토성으로 쌓았는지도 모르겠다.
토성이 세월을 지나며 조금씩 내려앉았겠다.
석성 마지막 구간을 내려와 본다.
동문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갑자기 고도가 낮아지며 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성 안에 있는 대숲이다.
마을로 내려와 건너편 성벽으로 오르는 길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가정집에서 끝난다.
옆에 있는 오천면 행정복지센터에 들어가 안내를 받으려는 데,
젊은 직원 한 분이 자기를 따라오라며 더운 날씨인데도 제법 많이 걸어 올라가 입구를 알려준다.
더운 날씨에 이런 친절을 보이기도 쉽지 않은데, 길을 안내한 그분께 감사드린다.
이곳이 남문이 있던 곳인가 보다.
성벽의 대부분은 예초기로 잡초 제거를 했으나 이곳부터 방치된 상태다.
사실, 즐풍처럼 수영성 전체를 일일이 탐방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왔다는 증거로 입구에서 영보정까지만 올라가면 주요 시설은 전부 보는 셈이기 때문이다.
성안 풍경
충청수영성은 제법 규가 있어 낮은 곳으로 도로가 지나고 양쪽은 민가는 물로 행정복지센터,
교회, 상가까지 즐비하다.
충청수영성은 이 소나무를 끝으로 바로 마을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설치됐다.
사실 수영성에 치성 발굴조사가 있다고 해도 치성이라고 보이는 데가 없다.
이곳은 해전을 염두에 둔 사령부이기에 육전보다 해전을 염두에 두고 지은 성벽이다.
오늘 보령지역의 남포읍성, 보령읍성, 충청수영성을 차례로 둘러봤다.
해안이란 지역적 특징으로 왜구의 출몰에 대비해 산성보다 읍성에 치중한 지역이다.
이러한 읍성은 남해안에서 충청도 홍성까지 한결같이 이어지는 현상이다.
물론 육지에도 주민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읍성은 많다.
조선의 세종 때 학자인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이다"라고 말했다.
세종 이후에도 산성과 읍성 만들기는 계속됐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며 많이 사라진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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