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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동짓날 팥죽 먹는 대신 청주 상당산성 탐방

by 즐풍 2021. 12. 23.

2021_172

 

 

2021.12.22 (수)  10:17~14:03  맑음

 

 

오늘은 연중 날이 가장 짧다는 동짓날이다. 

올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절기로 내일부터는 낮이 길어진다.

추위가 절정인 소한과 대한이 남아 있으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다.'고 봄을 기대할 시기가 되었다.

내년 1월이 지나면 설을 쇠고 바로 봄에 들어선다는 입춘이다.

 

겨울이라지만 간헐적으로 추위가 찾아올 뿐 아직 이렇다 할 추위는 없다.

서서히 땅이 얼기 시작해 소한과 대한에 극한에 이른 다음 풀리리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한 달 동안 마지막 추위가 찾아올 것이다.

이런 틈에 날도 풀리고 미세먼지가 없는 오늘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

 

영동 황간에 있는 월류봉과 월류정을 다녀오려고 대중교통을 알아보니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다.

아무래도 겨울엔 눈이 수북하게 오고 포근한 날 가야 멋진 풍경을 마주할 테니 다음으로 미룬다.

하여 행선지를 바꾼 게 청주에 있는 상당산성이다.

지난번 오산의 독산성, 9월에 다녀온 고창읍성과 무장읍성의 산성 풍경에 반했기 때문이다. 

 

 

 

□ 청주 상상산성(上黨山城)

 

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상당산성은 충주시 동쪽에 솟은 상당산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가 4.25km에 달한다.

현재 상당산성은 동문 섬은·서문·남문의 3문과 2개의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산성이 처음 건축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상당'이라는 이름은

백제 시대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上黨縣)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신의 아들 김원정이 쌓은 서원술성(西原述城)과 연계하여 통일 신라 초기에 건축되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로,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중 원균이 산성을 급히 고쳐 쌓았으며,

숙종 42년(1716)부터 영조 23년(1747)까지 대대적인 수리와 복원이 진행되었다.

청주읍성에는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가 머물고,

상당산성에는 종 3품의 무관 병마우후**가 3,500여 명의 병사와 함께 머물며 청주읍성의 배후를 방어하였다.

성안에는 병마우후가 근무했던 관아 건물을 비롯하여 포루, 군기고 등 300칸이 넘는 건물들이 있었으며,

성을 유지 보수하는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도 있었다.

당시 상당산성의 모습은 영조 40년(1764)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래 운조루 소장

<상당산성도>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상당산성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통일신라 석축산성 문화의 기술적 총체를 보여 주는 문화재이다.

 

**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 성벽이 계곡을 감싸며 산지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는 성

** 암문(暗門): 성벽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 놓은 문으로 평소에는 돌로 쌓아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비상구로 이용한다.

** 치성(雉城):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한다.

** 수구(水口): 성벽 위에 흐르는 물을 흘려 내보내는 곳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선 시대,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 2품의 무관직

** 병마우후(兵馬虞候): 조선 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를 보좌하는 종 3품 외관직

                                                                                                       (출처_남문 안내문)

 

 

상당산성 트래킹 코스

 

 

 

평택역에서 조치원역까지 표를 끊고, 조치원역에서 환승해 청주역에서 하차했다.

각각의 열차를 앱으로 끊을 때 모두 6,100원이 들었다.

올 때 공용 와이파이가 잘 안 터져 역무원에게 끊었더니 환승하는 거로 발매해 4,000원이 들었다.

환승할 때 이런 시스템을 이용하면 훨씬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당산성 버스 종점에 내리면 저수지가 바로 옆이다.

카카오 맵에 저수지 이름이 안 나와 네이버 지도를 봤더니 성내방죽이라고 표시했다.

이런 저수지라면 유사시에 물 걱정 없이 몇 달은 버틸 수 있겠다.

저수지 옆은 산성 탐방객을 위한 식당이 즐비하다.

 

왼쪽은 모서리에 있는 작은 치성이다.

 

 

 

 

 

 

□ 상당산성

 

상당산성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포곡식( 골짜기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쌓는 방법)

석축산성이다.

둘레가 4.2km, 내부 면적이 727,273㎡에 이른다.

축조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원장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 고쳐 지은 후 숙종 42년~45년(1716~1720)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이루어졌다.

1895년 전후한 시기에 산성으로써의 기능이 상실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해방 이후 정비·보수하였다.

현재 성곽 시설로는 공남문(남문)을 비롯하여 진동문(동문)과 미호문(서문), 치성, 암문 등이 있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정비공사로 동·남문루와 진동문이 재건되었고,

1992년 말에는 동장대도 재건되었다.

또한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만든 것이다.

중부내륙 지역의 군사적 유충지에 축조된 상당산성은 한양도성이나 남한산성 등

도성과 관련된 성곽 외에는 가장 큰 규모이다. (안내문)

 

 

 

 

구례 운조루에 남아 있다는 상당산성을 모사한 것이다.

 

 

상당산성의 남문에 해당하는 공남문이다.

 

상당산성에서 공남문은 풍경이 제일 근사하다. 밖은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이런 잔디밭을 지나면 바로 성벽을 마주하게 돼 성벽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방문하면 좋은 곳이다.

 

 

 

 

□ 치성((雉城)

 

성벽의 바깥으로 성벽의 일부를 덧대어 내밀게 쌓은 것이 치성이다.

적군이 성벽 아래에 바짝 붙으면 성벽 위해서 고개를 내밀고 공격하기 어려우므로

현안(懸眼:성벽 바닥 가장자리 일부에 구멍을 낸 것)을 만들거나,

비스듬히 볼 수 있게 치성을 만들어 옆에서 공격할 수 있어야 하였다.

치성의 치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볼 수 있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 한다.

치성은 전술상 평지 성문의 좌우, 혹은 성벽이 곱게 뻗은 부분에 주로 설치되었다.

상당산성에는 남쪽 성벽이 곧게 축적되었으므로, 그 양쪽 끝 능선 위에서

성벽에 돌아가는 위치가 되는 남문 동측과 서남암문 동측에 하나씩의 치성을 만들어 방어력을 높였다.

또 남쪽 성벽의 계곡 방향 경사면에 치성을 두어 성벽이 비탈길을 지나는 구조적 약점을 튼튼히 보강하고,

동시에 남쪽 성벽의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이 굴곡을 이룬 서쪽, 북쪽, 동쪽 성벽에는 성격이 계속하여 굴곡을 이루며 굽이 돌기 때문에

따로 치성을 설치하지 않았다.       (안내문)

 

 

이 성벽은 새로 복원하며 쌓은 것이라 바로 티가 난다.

 

 

□ 서남 암문

 

암문이란 몰래 드나드는 작은 사잇문이다.

성벽의 바깥 산 아래에서 드나드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곳에 만든다.

이곳으로 아군이 사람과 가축 및 식량 등을 성원으로 몰래 들여오거나,

적군 몰래 아군을 내보내 성 밖과의 연락을 하거나, 적의 뒤쪽으로 출동하기 위해 나가는 용도로 만들었다.

암문의 응급적인 방어력을 높여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곧장 폐쇄할 수 있도록

문의 안쪽에 흙더미나 돌을 쌓아두기도 했다.

상당산성에는 동복 암문과 서남 안문의 두 암문이 있다.

서남 암문은 남화문(南和門)이라고도 불렸다.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약 1.7㎞ 남쪽의 것대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위치이며,

남문 밖에 모여든 적군의 후방으로 나가 포위하거나,

산성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로 주변을 관찰하기 위해 통행이 가능한 곳에 자리하였다.

암문의 규모는 너비 약 166cm, 높이 약 172cm이고 구조로 보아 문짝을 듣고 빗장을 질러 문을 닫도록 되어 있었다.

                                                                                                                   (안내문)

 

 

 

산성 안쪽은 소나무가 그득하고, 밖은 침엽수림이다.

성벽에서 일정 거리의 나무를 잘라 내 화재 시 안정을 확보함은 물론 시야도 좋다.

 

 

 

멀리서 보는 미호문

 

 

 

안쪽에서 보는 미호문 

 

 

□ 미호문(弭虎門·서문)

서문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고쳐 쌓으면서 새로 만들어졌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땅 모양이 호랑이가 뛰기 전 움츠린 모양으로,
호랑이가 떠나면 땅기운이 다하므로 호랑이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문을 세우고 미호문이라 하였다.
이는 서문의 위치가 산성을 기준으로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상당산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의 성문이 있다.
서문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아래위 2개의 무사석( 武沙石, 네모반듯한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 위에
장대석을 올려 만든 평문 구조로 되어있다.
서문은 세 곳의 성문 가운데 가장 특이한 평면을 가지고 있는데,
성 밖으로 좌우에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옹벽을 만들고,
문 안에서 왼쪽으로 휘게 돌아오게 문루(門樓)에 오르게 하였다.
이는 흔히 암문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서문에 이를 응용하여 비용을 줄이고 전술 효과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문루는 1978년 복원 후 지반이 침식하여 변형이 일어나 2015년 해체 후 복원하였다.
사용된 수막새 문양과 벽돌은 1995년 서장대 발굴 조사 중 나온 조선 후기 양식을 따랐다.
미호문에서 바깥으로 38m 떨어진 곳에 옛 서문 자리가 남아 있다.
문길의 길이는 590cm이고 측벽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옛 서문 유구는 발굴 조사 자료를 토대로 2003년도에 정비하였다. (안내문)

 

 

 

 

 

□ 상당산성 포루 터

 

포루는 성벽 안쪽에서 밖을 향하여 화포를 발사하기 위해 방어하기에 긴요한 곳에 만든 군사시설이다.

건물을 지어 만든 집 모양을 한 것을 포루라 하고, 성벽에 포혈을 만들고 화포를 배치한 것을 포대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15곳에 포루를 만들었는데, 평균 대략 240m에 하나씩 둔 셈이다. (안내문)

 

 

새로 쌓은 성벽

 

 

□ 상당산성 수구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거나 내보내는 시설을 수문이라 하고 규모가 작은 것은 수구(水口)라 한다.

상당산성에는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 장치로 남문과 동문 사이에 수문이 설치되어

많은 성안의 물을 내보냈으나, 수문으로 몰려들지 않는 곳의 물을 내 보내기 위해

서쪽 성벽 두 곳과 동쪽 성벽에 한 곳에 수구를 만들었다.

북쪽 성벽의 수구는 성벽이 작은 계곡물 모아 내보낼 위치에 성벽 중간을 통과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성벽 안쪽으로 모여든 물이 모아져 나가는 물길을 만들고,

물이 성벽 바깥으로 나가는 배수로는 성벽 속으로 도랑을 낸 것이다.

바깥에서 보면 수구는 정면이 네모꼴이며 성벽 중간에 있다.

바깥의 낙수면 아래, 즉 성벽 바깥은 돌 다짐 위에 기단석을 두고 약 28cm 안쪽으로 들여서

성벽을 5층 약 120cm 높이까지 축조하였다.

수구 바닥에는 너비 80cm, 두께 16cm의 넓은 판석을 깔았다.

그 위에 너비 32cm 공간을 두고 높이 34cm 크기로 수구를 둔 위쪽에 너의 75cm, 두께 18cm의 뚜껑돌을 얹었으며,

그 위로 다시 성벽을 쌓았다.

수구의 안쪽은 길이 200cm, 너비 34cm, 높이 35cm 크기의 배수로이다. 배수로 바닥 역시 판석을 깔고,

옆면은 좌우 한 층씩 벽석을 두고 위에 뚜껑돌을 얹어 밖으로 약 15°의 경사를 이룬다.

이 배수구에 이어지는 안쪽에 너비 250cm, 길이 210cm 크기의 타원형 석축이 있어서

이곳에 모인 물이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안내문)

 

 

 

이와 같이 성벽과 작은 능성 사이에 물이 고이면 성벽으로 넘치며 성벽이 유실될 염려가 있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사진에서 보이는 안내판 뒤로 수문이 설치된 것이다.

 

 

상당산성 정상으로 이곳에는 북포루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 상단산성 동북 암문

 

암문은 작게 만든 사잇문으로 적군에게 그 위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다.

상당산성에는 서남암문과 이곳 동북 암문이 있다.

북쪽 성벽에는 성문이 없고 동쪽 성벽에는 수문과 동문이 비교적 낮은 위치에 있다.

이 암문은 동북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드나드는 곳일 뿐만 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로 나가서 에워쌀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마련하였다.

규모는 정면의 너비 약 137cm, 높이 162cm이고, 안쪽에서 문짝을 닫고 빗장을 질러 막는 구조이다.

암문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는 암문을 만든 책임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는 1728년(영주 4)의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 때 성문을 열고 반란군에 가담했던 인물이 있다.

                                                                                                              (안내문)

 

바로 이 명문이에 이름 석 자를 갈아버린 게 눈에 띈다.

반란군에 가담했던 이름을 따 청주 지역에서는 '신천영의 난'이라고 부른다.

 

밖에서 본 동북 암문

 

 

 

 

 

□ 진동문(鎭東門)

청주 상당산성의 성문 중 동문인 진동문이다.

성의 동쪽 출입구인 진동문은 동남쪽 해발 350m 내외에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한다.

1977~1978년에 보수공사를 했으며, 이때 문루도 함께 복원되었다. (안내문)

 

 

진동문 원경

 

□ 보화정(輔和亭)

 

보화정은 상당산성의 동장대이다.

장대는 장군의 지휘와 주변의 감시를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상당산성에서는 2곳에 설치되었다.

보화정은 동벽과 남벽이 교차하는 모서리 평탄지에 위치하고 있다.

보화(輔和)는 '모든 주민들이 화합된 의지로 지킨다.'는 뜻이라고 한다. 

 

보화정 아래 저수지가 있고 마을과 연결된다.

다른 건물은 모두 문(門)인데, 이곳은 정자 정(亭) 자를 쓴다.

 

 

□ 제승당(制勝堂: 서장대)

 

동쪽을 향하여 정면을 두고, 멀리 낮은 위치의 동장대를 내려다보는 위치다.

앞에 평지를 만들어 군사를 점호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1995년 발굴조사로 크기가 6칸이라는 걸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걸 확인했다.

폐허가 된 터를 기초로 2014년에 복원하였다.

예전에 사용되었던 막새기와가 남문 밖 기와가마에서 구워진 사실을 토대로 기와를 복원하였다. (안내문)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고 중간을 가로질러 진주박물관으로 하산하려다 만난 제승당이다.

 

청주 박물관으로 내려간다는 게 방향이 틀어져 청주 박물관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청주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까 막 떠난 뒤라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세 시간 남짓한 짧은 탐방에 오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린 탐방이다.

그래도 멋진 상당산성에 반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