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_168
2021.12.5 (일) 2시간 산행, 6km 이동 맑음
2009년 하반기부터 산행을 시작해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은 산행에 집중했다.
가끔 지역 탐방에 나설 때 그 지역 명소를 탐방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은퇴하고 난 이후 행동반경이 넓어지며 전국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갈 곳이 많이 생겼다.
때때로 훌쩍 떠나 며칠씩 지방 순례를 하며 평소 갈망했던 곳을 하나둘 보는 게 좋다.
이젠 기름값이 비싸 맘 놓고 차량으로 이동하기 힘든 세상이 왔다.
정부에선 서민의 기름값을 걱정해 유류세를 인하하긴 했어도 언발에 오줌 누는 시늉 밖에 안 된다.
코로나19 변종인 오미크론 파장에 원유 가격이 폭락해 정유업계가 긴장한다는 뉴스를 봤다.
국경이 닫히며 이동이 제한되면 세계경제가 휘청거릴지 모르나 당장 유가 하락을 기대한다.
고유가로 차량 운행이 힘들어 요즘은 지하철이나 기차를 이용해 근교 위주로 산행과 여행을 다닌다.
다중이용시설인 역사나 열차 안은 다소 위험해 마스크가 잘 밀착되도록 착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니 도로에서 지·정체할 때 갖는 스트레스가 없어 좋다.
게다가 운전할 때 안 보이던 주변 풍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 새로움을 얻는다.
□ 독산성(禿山城)
독산성(禿山城)은 백제시대 쌓은 것으로 성 둘레가 1,100m이고 오산과 수원, 화성의 평야 한가운데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25년(1592)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 주둔하며 왜군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아군이 경기지역으로 북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도성을 방어하는 큰 축을 담당하였다.
현재 성내에는 국가사적 140호인 세마대지(洗馬臺址)가 있는데 「화성지(華城誌)」에 의하면
왜군이 독산성에 물이 부족함을 알고 성안을 포위하자,
권율 장군이 말을 산 위로 끌고 가 쌀로 씻기는 시늉을 해 보여 왜군이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으며
이후 그곳을 세마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출처_오산시청]
오산 독산성 탐방 코스
□ 독산성과 세마대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는 1,095㎡의 테뫼식 산성과 산 정상부에 복원되어 있는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장대*를 말한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독산성은 백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여주 파사성, 용진 토성 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데 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다시 지었다.
정조 6년(1796)에는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를 했고,
정조 20년(1796) 수원 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 체제(協守 體制)**를 구축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세마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 안에 보적사가 있다.
내부 시설로 성문 5개, 치(雉)*** 8개, 우물 1개, 수로 1개가 남아 있다.
*장대: 장수의 지휘대
*협수 체제: 서로 협력하여 지키는 구조
*치: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 (안내문)
□ 동문
동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와 이름이 없다.
동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동문은 1982년에 정비하였다.
*평거식 성문: 양쪽 벽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상으로 걸쳐 방형의 통로를 만든 성문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문루: 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 (안내문)
□ 보적사
보적사(寶積寺)는 현재 독산성(禿山城) 동문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戰勝)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 3동이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1931년 편찬된 「화성지(華城誌)」에 따르면 보적사는 21칸 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약사전을 허물고 새로 지었으며, 1987년에 고쳐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는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 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과 요사 2동, 3층 석탑이 있다.
'보적사'라는 명칭에는 재미난 유래가 전해지는데,
옛날 삶이 궁핍한 노부부가 쌀 두 되만 남게 되자 구차하게 굶어 죽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먹고
공양 후 집에 돌아오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런 보적사 또한 다른 사찰들처럼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중건과 재건을 거듭하였고
현재는 대웅전과 3층 석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내문)
대웅전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과 탱화
요사채
삼성각
3층 석탑
보적사를 잠깐 둘러보고 이제부터는 독산성을 한 바퀴 돌 생각이다.
그동안 제법 많은 산성을 탐방했다.
그중에 제일은 중국의 만리장성으로 산성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높다.
성벽 위로는 말이 몇 필이 교차할 정도로 넓다.
우리나라 산성은 서울도성을 비롯해 북한산성, 남한산성, 금정산성은 그래도 성벽이 제법 높다.
독산성도 돌로 쌓은 석성이긴 하나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수준이다.
적을 겨누기 위해 머리를 들었다간 사정권에 들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런 산성에서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쳤다니 천만다행이다.
세마대 터이다.
이곳에 말을 세우고 쌀을 물로 보이도록 말을 목욕시키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식수가 부족해 곧 무너질 것이란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멀리서 보면 일견 물로 보이기도 할 테니 조상의 슬기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안 배워 세마대를 보고 뜻을 유추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든다.
오우~
이곳은 성벽이 높아 앞서 가졌던 우려를 불식시킨다.
□ 남문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鎭南樓)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이었으며,
남문은 영조, 정조, 순조 때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었던 것을 1979년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다.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2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남문의 통로인데, 이 위에 문루가 있었다는 걸 상상해 보자.
오산시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재산세가 많이 걷히면 곧 복원될 것으로 믿는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독산성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백성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의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더 고쳐 쌓도록 명하여
지금의 독산성의 모습이 갖춰졌다. (안내문)
저기 보이는 암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 개거식 성문을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 서문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 14년(1790)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하였다.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83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분명 문을 설치했던 흔적이므로 천장에 평거식으로 돌을 깔았을 것이다.
이 또한 언젠가 복원되기를 바란다.
북문의 평거식 성문이다.
북한산성에서는 흔히 암문이라 부른다.
돌확석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게 고정시키는 구멍이므로 이런 암문이나 성문에 설치된다.
세마대
세마대 중건기
□ 세마대(洗馬臺)
세마대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將臺)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1957년 8월 15일 민간으로 구성된 '세마대 중건 위원회'에 위해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북쪽에는 '세마대(洗馬臺)'라는 현판이, 남쪽에는 '세마대(洗馬坮)'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중 남쪽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는 세마대와 관련하여,
'도원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샘이 적어 오래 지키게 어려웠다.
적이 그것을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은 군사에게 적을 향하여 말을 세우고 쌀을 흔들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
그것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우연히 찾은 세마대를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녀왔다.
세마대에서 세마역까지 버스 편이 마땅치 않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막 출발한 뒤라 1km를 걸어서 이동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집을 나선다는 건 새로운 즐거움이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주읍성의 여하정과 안회당 (0) | 2022.01.19 |
---|---|
홍성의 옛 지명을 딴 홍주읍성 너무 멋져 (0) | 2022.01.18 |
동짓날 팥죽 먹는 대신 청주 상당산성 탐방 (0) | 2021.12.23 |
고창읍성에 반해 이번엔 고창 무장읍성에 왔어... (0) | 2021.10.16 |
고창군의 고창읍성은 작아도 우리나라 3대 읍성이야… (0) | 2021.10.16 |
고소산성-신선대-구름다리-성제봉-수리봉 연계산행 (0) | 2021.08.27 |
진주성 일부만 살펴보기 (0) | 2021.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