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_17

2020.03.20. (금)ㅈㅌ 06:34~14:28(전체 시간 7시간 56분, 전체 거리 20.8km, 평속 2.7km/h) 맑음
아차산(296m)과 용마산(348m), 망우산(282m)은 해발 300m 내외의 낮은 산이다.
산이 낮다고 해도 산은 산이니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6년 전 광복절에 인천에서 제일 높은 계양산(395m)을 필두로 대부분 300m 이하인 인천대간을 산행했었다.
혹서기인 8월 15일에 장장 11시간 반을 산행하며 마지막에 길을 놓쳐 미완으로 끝내며 무진 고생을 했다.
이번 산행은 인천대간보다 훨씬 낮고 거리도 짧으나 긴장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
차량 회수를 위해 왕복해야 하는데, 동일한 구간의 왕복을 최소화해야 하니 주의해야 한다.
지도를 지참하지 않았으니 왕복구간은 감(感)과 트랭글에 의존해야 한다.
행운이 잘 따라 주길 기대하며 산행을 시작한다.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 산행코스

제법 일찍 도착하니 망우리공원 주차장은 아직 여유가 있다.
서울외곽순환도로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주차비가 무료다.
하산 후 차량을 뺄 땐 주차장뿐만 아니라 도로까지 양쪽으로 길게 주차를 해 빠져나오기도 힘들었다.
산이 낮아 아침부터 인근 주민, 특히 노년층이 산책을 즐겨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막 떠오르는 일출

망우산 공원묘지는 일제가 1933년에 조성했다고 한다.
많을 때는 28,500기의 봉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7,500기 정도만 남아 있다.
묘지는 대체로 작은 편이다.
어떤 묘비는 "본관 성씨지묘(本貫 姓氏之墓)"라고 이름도 없이 성만 쓴 묘비명도 많다.
그만큼 오래된 묘역이다.

송촌 지석영의 묘
서울 종로구 낙원동 출생(1855-1935)
일찍에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읽으며 우두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9년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두 달간 우두법을 배운 후
처가인 충주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 시술에 성공하고 이후 종두법의 보급에 힘썼다.
종두법의 도입으로 최초의 서양 의학 도입자가 되었으며
1899년에는 관립의학교(서울역의대의 전신)의 초대 교장을 지낸 의학계의 선구자이다.
의학 외에도 한글과 농학 연구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1883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대구판관, 동래부 관찰사 등의 관직도 지냈다.
한의사인 부친에 이어 장남 지성주(우측 묘)는 경성의전을 나온 유명한 내과의사였고,
손자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으며,
증손자 또한 서울 성내동에서 내과를 경영하고 있어 5대째 의사 가문이기도 하다. (안내문)

역사의 전망대
풍수적으로 이곳 망우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역사적으로는 온돌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과 아차산 능선에 산재한 고구려의 유적이 말해 주듯
한강 유역은 중국과의 교역로이며 땅은 비옥하고 전쟁에 유리한 지형으로 삼국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백제와 고구려(475-553, 장수왕)에 이어 신라(진흥왕)가 이곳을 차지하며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외사산(外四山: 관악산, 북한산, 수락산, 아차산)의 좌청룡의 자리로
한양을 병풍처럼 둘러싸며 조선 500년을 지켜왔다.
이제는 일제가 만든 시립공동묘지(1933~1973)의 어둠을 벗어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선진 한국의 새벽을 여신 분들이 모여 있는 우리 근대사의 성지가 되었으니
이곳에서 맞는 해돋이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의미가 깊다. (안내문)
막 산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장소에 마침 해돋이를 예견이라도 하듯 이런 안내문이 있다.

망우산 전망대

망우리의 유래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사직을 마련 후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을 답사했다.
무학대사는 그 자리가 선왕의 능지보다는 태조의 신후지지(身後之地: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 둔 묏자리)로
더 적합하다고 권고하였다.
태조는 그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 곳을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었다.
이에 태조가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경탄한 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안내문)

망우산 1보루
망우산의 보루 중 훼손이 심한 2. 3보루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망우산 남쪽 끝봉 우리(해발 280.3m)에 자리하고 있으며, 용마산 보루와 시루봉 보루 일대가 잘 조망된다.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 여러 개가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로 추정된다.
헬기장과 군용 참호·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유적을 돌아가도록 등산로를 새로 만들어 보루를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망우산도 이젠 거의 다 지나 용마산 정상에 태극기가 보인다.

드디어 용마산 정상에 도착했다.
남동쪽으로 롯데타워 건물이 주변을 압도하게 우뚝하게 들어선 모습이 보인다.

용마산
용마산은 망우산과 아차산의 최고봉(348m)으로 면목동 동현에 위치한다.
망우리공원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아차산성으로 연결되는 중간 지점의 산이다.
용마산 정상과 태극기

강 건너 장안동, 전농동과 강 안쪽 중곡동 일대

용마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리다 급격히 떨어지는 능선

지나온 망우산 능선

멀리 북한산 정상인 만경대와 백운대, 인수봉이 오른쪽에 돌출되어 보인다.


아차산 4보루는 이런 목재 데크를 따라 오르게 된다.

아차산 4보루

아차산 일대 보루군(사적 제455호)
아차산은 용마산과 망우산 등 주변 산지와 연결되어 있어 조선시대까지는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 불렀다.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라고 하는 군사유적이 있다.
보루(堡壘)는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이다.
백성이 거주하던 산성과 달리 교통로 확보를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던 곳이다.
아차산 보루는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백제, 신라에게는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교통 요지였다.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도 한강 남쪽 공략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아차산의 보루는 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한강 건너 남쪽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관계에 있던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안내문)
아차산으로 가며 뒤돌아 본 용마산

내려온 아차산 4보루는 중간중간 흰돌이 박혀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이 아차산 정상이다.
우측 돌무더기에 살짝 솟은 돌이 정상 표지석이다.

아차산
아차산은 해발 3백 미터 정도의 낮은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이 자주 찾는다.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아차산은 용마봉과 망우봉 등 주변 산지와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시대까지는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의 고분, 고려시대의 석탑(아차산 3층 석탑), 절터 등 수많은 유적이 산재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이자 역사 교육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이곳에는 능선을 따라 봉우리마다 '보루'라고 하는 군사유적이 약 20여 개 있다.
아차산의 보루군은 삼국시대 한강을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2004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적 대부분은 지표면 아래에 보존되어 있으며, 아차산 4보루에서는 일부 복원된 성벽을 볼 수 있다.
(구리시청)
누군가 이곳에 돌무더기를 모아 놓고 그중 큰 돌에 아차산 정상이란 표지석을 만들었다.
지역의 많은 주민이 이용하지만, 변변한 표지석조차 없어 홀대받는 느낌이다.


아차산은 제법 암릉이 많은 곳이나 4보루 구간은 이런 흙길이라 걷기 좋다.

용마산 뒤로 보이는 시가지엔 매연인듯한 가스층에 제법 높은 층을 이룬다.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건 이렇게 오염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알게 모르게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매 순간 미세먼지나 환경호르몬 가득한 매연이 우리 몸속에 축적되어 목숨을 갉아먹는다.
이를 피해 산속에서 살면 수입을 만든 여력이 없으니 이를 어쩐담...

아차산에서 제일 근사한 소나무는 두 그루가 어울려 더 멋지다.
하나보다 둘이 어울려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또 하나의 보루

망우산부터 용마산, 아차산에 이르기까지 보루의 연속이다.


고구려정(高句麗亭)
1984년에 처음 건립한 콘크리트로 만든 팔각정은 노후하여 철거하고 2009년 새로 세웠다.
기둥은 고대 그리스 도리아식과 비슷한 기둥으로 가운데는 볼록한 고구려 전통양식의 배흘림식이다.
자재는 3백 년 이상 뒤틀리거나 변하지 않은 금강송이며,
기와는 고구려 궁궐인 평양 안학궁터와 아차산 홍련봉 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문양은 상영총과 강서중묘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표현된 문양을 참고하여
남한 최초로 당시 건축양식을 채택했다. (안내문 편집)
고구려정은 고구려의 기상만큼 시원하고 웅혼한 멋이 있다.


아차산성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단성 또는 아차성이다.
삼국사기에 이 성을 286년(백제 책계왕 28)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이 성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과 1999년에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조사사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차산성은 부정 육각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km가 조금 넘는다.
성벽은 높이 7m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안팎 모두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성벽 바깥 기저부는 별도의 보강성벽을 쌓은 후 흙으로 덮었다.
해발 203m의 북쪽 모서리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고, 동, 서, 남쪽에 문지가 남아 있다.
계단상 지형을 이루고 있는 성 내부에서 여러 기의 건물터와 연못, 우물,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차산성은 백제가 수도 한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으나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시설물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이 산성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안내문)

출토유물
1~4번: 연화문수막새 5번: 북한산성 명 기와 6번: 청동거울 7번: 철제마(鐵製馬) 8번: 개원통보
9번: 삼각집선문토기 10번: 단각고배(短脚高盃) 11번: 대부완(臺附盌) 12번: 줄무늬병 13번: 인화문유개직구호

아차산성을 한 바퀴 돌려고 왼쪽으로 진입했으나 도는 길이 없어 되돌아왔다.
입구까지 온 후 발굴 경과를 담은 안내문을 살핀 후 망우산으로 되돌아간다.
아차산성은 막아놓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보는 산성 풍경이다.


아차산 유래
옛날에 삼청동에 점을 잘 친다는 사람이 있어서 임금이 그를 불러들였다.
"네가 점을 잘 친다고 하니 한번 쳐봐라." 하고는 통 속에 쥐 한 마리를 감춰 놓고,
"이 안에 있는 쥐가 몇 마리냐?"하고 물었다.
이에 점쟁이는 세 마리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쁜 놈!, 한 마리인데 세 마리가 들었다고 하니 이놈을 죽여버려라."하고 임금이 말했다.
여러 장정이 그 점쟁이를 붙잡아 나간 후 임금이 이상해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있었다.
임금은 즉시 사람을 보내 죽이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이 사람이 달려가면서 죽이지 말라며 손을 들어 표시하는 걸 본 백정이 빨리 죽이라는 것인 줄 알고 바로 죽였다.
그래서 아차라는 말이 나온 후 사형장이었던 이곳이 아차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안내문 편집)
(좀 더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뉴스를 검색해 올린다.)
아차산에 얽힌 이야기 중 조선 명종(明宗) 때 인물 맹인 홍계관이 있다.
점쟁이였던 홍계관의 점괘는 매우 신통해 궁궐까지 퍼졌고 미신을 믿지 않았던 명종은
점쟁이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 백성을 속이는 자들로 생각해 홍계관을 궁궐로 불러들인다.
“여기 상자에 쥐가 몇 마리 들어있느냐?”
홍계관은 “예, 5마리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쥐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명종은 사람들을 속인 죄를 물어 홍계관을 처형하라 명한 뒤
혹시나 해서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4마리가 있었다.
“아차! 내가 잘못 알았구나.”
명종은 ‘아차’ 하며 형 중지를 명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의 사형은 집행돼 죽어 버렸다.
이후 형장이 있던 고개를 아차고개라 했으며 아차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출처 : 헤드라인 뉴스(HeadlineNews) 일부 발췌

왕복하며 다시 보는 아차산 보루


어느 샘물

아차산 시루봉 보루

시루봉 보루 역시 주변보다 높은 왕릉처럼 보인다.
진디가 잘 깔린 정상엔 여서 두 명이 골프 치는 연습을 한다.
아담하고 작은 데다 나무 두 그루가 보루의 운치를 더한다.

이젠 골프도 거의 전 국민이 즐기는 운동이 된 듯싶다.




어쩌다 태종 이방원의 빈인 효빈 묘에 들어섰다.
효빈 묘는 최근 바로 아래에 있는 묘부터 시작해 제법 넓은 지역에 산불이 났다.
묘역 주변은 산불로 나무 아래 작은 나무와 풀은 다 탔는데, 묘지엔 짚을 썰어 뿌렸다.
사진으로 봐선 그저 잔디처럼 보인다.
즐풍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동네 어느 묘에 불을 질러 할머니께서 이렇게 짚을 썰어 뿌리고
묘에 제사를 지낸 후 주인에게 사죄를 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묘역을 지나 얼마큼 가다 보니 산악자전거를 타던 사람이 일반인과 대화를 나누는 걸 들어보니
10여 년 전에도 바로 이 자리에 산불이 났었다고 한다.
누군가 고의로 산불을 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효빈 김씨(孝嬪 金氏, ? ~ 1454년)는 조선 3대 임금은 태종의 후궁으로 경녕군의 생모이다.
미모가 빼어나 신덕왕후 조차도 태조 앞에 내놓길 꺼려했다고 한다.
후궁이라 겨우 빈(嬪)의 칭호 하나를 받았을 뿐 왕릉 옆에 모시지도 못했다.


산불 흔적

백송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로 오래된 수피는 조각으로 벗겨져 백색이 되기 때문에 백송이라 부른다.
제법 큰 나무라 보호수로 지정된 줄 알았더니 아직은 지정되기 전이다.
구리시청 담장 밖에 있다.

서울삼육중고등학교 못 미쳐 왼쪽 길로 들어서야 알바하지 않고 바로 원점 회귀할 수 있는데, 길을 놓쳤다.
트랭글로 경로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생각 없이 무심히 걸은 게 화근이다.
길이 없는 언덕을 어렵게 올라 삼육중고등학교를 관통해 길을 낸다.
여기서도 길을 확인하지 않고 가다 보니 도로와 마을을 지나 3km 넘게 알바했다.
묫자리 사이사이를 지를 때 샛길이 있기도 하고 없는 곳도 있어 돌파하기도 힘들다.
300m 높이에 불과한 작은 산이라고 얕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이렇게 길을 헤맨 끝에 망우산공원에 도착하니 19km나 되는 긴 거리를 걸었다.
이왕 걷는 김에 20km를 채우잔 생각에 아스팔트 깔린 옆길을 600여 m 더 왕복했다.

망우리공원묘지에 잠든 애국지사나 명망 있는 예술가를 사진과 경력을 기재한 안내문을 설치했다.
산이 낮고 묘지가 크지 않아 아기자기한 느낌이 좋은 묘역이다.
아이를 대동한 가족이나 노년의 부부끼리 정답게 걷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여러 묘지를 보며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고이 잠드시라, 이곳에 잠든 영령들이여...

산행을 끝내고 5km 거리에 있는 태조의 능이 있는 건원릉으로 가려던 계획은 피로로 포기한다.
건원릉의 이성계 묘를 덮은 억새가 피어나는 가을에 능침을 개방할 때로 미룬다.
태조의 능침에 얹힌 억새는 고향인 함경도 함흥의 흙과 억새로 심었다고 하니 특별하다.
매년 한식에 청완이라는 억새를 베기에 앞서 이를 알리는 고유제를 시행한다.
한식에 벤 억새는 다음 해까지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7월부터 현업에서 물러나 시간이 많으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탐방에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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