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조선왕릉

김포 장릉 탐방

by 즐풍 2023. 10. 18.

2023_159

 

 

2023. 10. 12. (목) 오전에 탐방

 

 

갑자기 강화도에를 가고 싶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이후 근현대인 구한말에 서구 열강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외세의 침입이 잦던 곳이다.

고려말 몽고가 쳐들어오며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 중국에서 군사를 이끌고 오면 제일 먼저 간 곳이 강화도이다.

이후 강화도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전쟁과 관련된 많은 문화유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외 박물관이라 할 만큼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강화도의 관문인 김포를 거치며 김포의 수안산성, 장릉, 문수산성부터 들리기로 한다.

작성 편의상 쉬운 장릉부터 포스팅한다.

 

 

장릉 주소: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김포시 풍무동 666-3)

 

 

 

 

세계유산 조선왕릉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as UNESCO World Heritage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500년 넘게 이어 온 왕조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입니다.

2009년에는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안내문)

 

 

 

 

김포 장릉을 돌보는 사람들  Guard for Jangnueng Royal tomb

 

조선시대 왕릉은 각 능별로 해당 관원과 수호군이 관리를 담당했다.

이들은 왕릉과 주변 산림 관리, 제사 준비, 청소와 화재 예방 등의 업무를 맡았다.

관원은 왕릉 관리를 총괄하는 사람으로, 참봉 2명이 임명되었는데, 1724년(경종 4) 영 1명과 참봉 1명으로 바뀌었다.

능 주변 백성 중 양인 남자는 수호군과 보인이라는 이름으로 왕릉 관리 의무를 졌다.

수호군은 순서를 정해 참봉 업무를 보좌하는 서원書員, 청소와 제사 준비, 경비를 담당하는 수복守僕 등의

특정 업무를 맡기도 했다.

서원 중 한 명은 경서원京 書員이라고 하여 서울에서 왕릉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였다.

이외에 능 주변 산림의 채벌을 감시하고 화재를 예방하는 산직山直이 있었다.

1876년(고종 13)에 작성된 「장릉지, 에 따르면 장릉에는 영 1명, 참봉 1명, 수호군 30명, 보인 60명,

유사 1명이 있었으며, 수호군 중 2명은 수복, 3명은 서원, 4명은 수직군의 역할을 수행했다.

 

In Jangneung, officials appointed by the state and local residents were mobilized to manage the royal tomb.

They were in charge of managing the royal tomb and surrounding forests, preparing for ancestral rites,

cleaning the royal tomb, and preventing fires.

According to the records of 1876, two officials and 30 tomb guards were assigned to Jangneung.

The tomb guards took turns in charge of staying at the royal tombs to work. (안내문)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유 The Reason for the Posthumous Honoring of Wonjong as a King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즉위 초반부터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선대 왕 선조, 추존왕 원종,

그 아들인 자신으로 이어지는 계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원종 추존을 둘러싸고 찬반의견이 팽팽하게 맞섰고 결국 인조 10년에 추존하였다.

 

King Injo ascended to the throne after a coup.

He posthumously honored his birth parents as a king and queen despite the intense opposition of officials

in an effort to promote the legitimacy of his succession to the throne. (안내문)

 

 

홍살문은 사당처럼 신성한 공간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자각과 수복방, 비각이 보인다.

수복방은 조금 앞에 있으나 사진은 원근의 거리감이 없다.

 

 

위에서 보면 丁 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영어를 많이 쓰는 요즘 젊은이들은 T 자로 보인다고 티자각이라 해야 하나...

 

 

비각과 육경원 비석 받침돌

 

 

비각(碑閣)

 

무덤 주인공의 표석(表石)을 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비각이다. 

표석은 보통 1.5미터 높이의 장방형 돌에 주인공의 호칭을 새기고 간략한 이력을 적는데 하부에 받침돌이 있고 

위에도 화강석으로 기와지붕 형태를 다듬어 올려놓는다. 

비각은 보통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의 간소한 규모이다. 

벽의 하부는 전돌로 채워서 내구성을 높이지만 상부는 나무로 창살만을 내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다.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안내문)

 

 

능의 구성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비각 안에는 한 기의 표석이 있는데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세운 표석이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毓慶園, 인헌왕후의 추존 전 원의 이름)으로 있을 때 사용한 비석 받침돌이 장릉 근처에서 

노출되어 발굴 후 전시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 되기 전 흥경원을 조성할 때의 호석이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후에 새로 설치한 석물이다.

                                                                                             (출처_조선왕릉 홈피)

 

 

 

 

ㅁ 원종(元宗) 이야기


원종(재세 : 1580년 음력 6월 22일 ~ 1619년 음력 12월 29일)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년(선조 13)에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원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 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지에서 자결하였고, 

정원군은 그의 화병으로 1619년(광해군 11)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첫째 아들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사친으로 정원대원군에 추존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ㅁ 인헌왕후(仁獻王后) 이야기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월 17일 ~ 1626년 음력 1월 14일)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딸로 1578년(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원종 사이에서 3남(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인조 1)에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연주부부인에 책봉되고 계운궁(啓運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이후 1626년(인조 4)에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632년(인조 10)에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출처_조선왕릉 홈피)

 

 

육경원 비석 받침돌 gravestone base of Yukkyungwon

 

인조의 어머니인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추존 인헌왕후)가 1626년(인조 4)에 승하하자

무덤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하고 이곳 김포에 예장하였다.

다음 해(1627년, 인조 5)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추존 원종)의 무덤 흥경원(興慶園)을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서 육경원으로 옮겨와 두 원을 합하여 홍경원으로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홍경원을 장릉(章陵)으로 격상시키면서 종전에 있던 석물들 중 사용하지 않게 된

일부를 능 좌측 언덕에 묻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육경원의 비석 받침돌이 지상으로 노출되어(2007년)

이 자리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안내문)

 

 

 

수복방이다.

왕릉에 다닐 때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굴뚝이 보인다.

정월 초하루 차례를 지내거나 이곳에서 겨울에도 근무를 선다면 당연히 구들에 불을 때야 한다.

그런데 왜 아궁이는 보이지 않는 걸까?

 

 

장릉을 둘러본 후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작은 연못이 보인다.

능역 주변에는 삼림이 우거져 화재 예방도 중요하겠지만 막상 불이 나면 물은 필수적이다.

화재에 대비하여 만든 저수지로 보인다.

 

 

 

 

재실(齋室) Tomb Keeper's House

 

이 건물은 원중(元宗)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의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면 공간이다.

능공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주문을 보관하는 안향정 3개,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고 祭器庫 1과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行廊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This house is where preparations were made for the annual menorial rituals held in honor of King Wonjong

and Queen Inheon, The house originally consisted of a lodge used by the tomb keeper and,

during the ritual period, court ceremony managers, a keeper's office,

a store room for incense and written prayers, a store room for ritual vessels, and multi-purpose quarters. (안내문)

 

 

재실 안으로 들어서니 모든 방문이 활짝 열렸다.

지난여름 장마가 길었기 때문인지 방안은 어디든 할 거 없이 곰팡이가 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온기가 없으니 곰팡이가 폈나 보다.

전기온돌이라도 설치해 주기적으로 틀어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는 게 좋겠다.

 

 

 

 

장릉 오솔길엔 이끼류의 작은 풀이 깨끗하게 자란다.

막 떨어진 도토리가 다람쥐 먹이가 되지 않으면 내년에 참나무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

 

 

인조반정으로 왕으로 오른 인조의 아버지는 정원군의 호칭에서 하루아침에 왕으로 추존되어 왕릉의 지위를 확보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며 실권이 약했던 인조는 국제정세에도 어두워 삼두고배의 쓰라림을 맛봤다.

여러 모로 부족한 임금이었지만, 아버지에게 왕릉을 물려줬으니 효자인 셈이다.

추존된 이후 조성한 왕릉이라 규모가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