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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조선왕릉

조선 성종과 중종의 릉이 있는 강남 선정릉

by 즐풍 2023. 3. 15.

2023_18

 

 

 

2023.2.20. (일)  오후

 

 

강남에 볼일이 있어 온 김에 선정릉을 탐방한다.

한때 조선 왕릉 전부를 탐방할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워낙 많은 일이 생겨 흐지부지됐다.

조선 왕릉은 서울이나 경기도에 한정되어 있고, 예외적으로 영월에 단종릉이 있을 뿐이다.

이런 역사 유적이나 문화재를 탐방하면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역사책을 읽으면 머리에 남고, 현장에서 직접 만나보면 더 많이 가슴에 남는다.

선정릉은 두 번째 발걸음이라 더 반갑다.

 

 

선전릉 안내도

 

 

ㅁ 조선왕릉의 입지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약 5개월) 동안 전체 상례에 대한 재정과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재궁(梓宮 관), 크고 작은 가마인 대여(大輿) 등, 각종 의장(儀仗)을 제작하며, 발인(發靷)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에 관한 업무를 하며, 

장례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와 혼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특히 빈전도감은 왕릉을 조성한 후 혼전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년상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부묘).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으로 건물 및 석물제작, 왕릉 자리 주변 정리 등 

능 조성에 필요한 인원 관리 및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통 하나의 능을 완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능역(陵役)에 동원되는 인원은 6천명에서 많게는 1만 5천 명 정도가 필요하다.

능지(陵地)는 보통 상지관(相地官)이 택지하게 되는데, 능지로서 적합한 자리 후보를 선정하고, 

새로 즉위한 왕에게 천거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한다. 

때로는 왕이 친히 답사하기도 하며, 생전에 미리 능지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선정릉에 들어서며 먼저 중종의 릉인 정릉부터 반 시계방향으로 둘러볼 생각이다.

 

 

ㅁ 정릉靖陵(중종)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왕 한 분을 모신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얼굴의 퉁방울 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정릉의 역사


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침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천장한 것이었으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던 자리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왜적과 결탁하여 왕릉을 훼손한 백운기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년) 11월 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위관(委官) 유성룡이 아뢰기를,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친 죄상을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 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릉과 정릉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위의 기록은 백운기라는 자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능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나무 한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벌을 주었는데, 

하물며 봉분과 재궁을 무참히 훼손하는데 가담하였으니, 백운기라는 자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선조실록에 "백운기가 왜적과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쳤다."고 되어 있는데,

그 아래 문단에, 선릉과 정릉은 이와 같이.... 왕릉이 파헤쳐졌다고 하여 왜 갑자기 태릉이 나왔을까 궁금하여

태릉 안내문에서 찾아보니 태릉이 파헤쳐졌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궁릉유적본부에 전화로 확인하니 태릉도 왜적에 의해 파헤쳐진 게 맞는데, 

그 내용이 태릉에 게시되지 않았으므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한다.

담당자는 이러한 내용에 막힘없이 응대하는 모습을 보며 역사에 정통한 분이 제자리에서 업무를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심껏 응대해 주시고 내용을 보강하시겠다는 담당자분께 감사드린다.

 

 

중종대왕 비각 

 

정자각

 

 

중종(中宗) 이야기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이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연산군이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유순,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중종의 묘지인 정릉 

 

 

 

문인석 무인석 등 석물

 

 

 

정릉 탐방을 끝내고 성종 묘역을 가는 언덕을 넘는다.

왕릉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아 겨울에도 늘 푸르름을 보여 더욱 운치 있게 느껴진다.

 

 

 

 

선릉宣陵(성종과 정현왕후)

 

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난간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석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문무석인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종 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능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尹起畎)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다. 

이 질문에 승지들이 비로소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아뢰었고, 

연산군은 그때서야 자신의 친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 3월 20일 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행패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앞장서 반대했음에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성종왕릉을 만나기에 앞서 성종의 왕비인 정현왕후의 묘역부터 만나게 된다.

정현왕후의 묘지는 다소 떨어져 있으나 성종의 묘역과 함께 선을으로 불린다.

 

정면에서 보는 정현왕후의 릉 

 

 

 

 

 

 

 

성종의 릉인 선릉으로 가는 길에 먼저 만나는 수라간 

 

 

성종(成宗) 이야기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1494년(성종 25)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미행(임금이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나가 민정을 살피는 것)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성종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분은 저의 스승이었는데,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밑에서 조망하는 선릉 

 

 

수라간

매년 제향을 지낼 때 음식을 덥히는 곳이다.

축관통고의 기록과 유적 발굴로 초석을 찾아 2014년에 복원했다. (안내문)

 

 

선릉의 역사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다.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 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다음 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수복방과 정자각, 수라간 

 

 

 


조선 전기 문물을 완성시킨 성종

 

선릉에 잠든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이자, 그의 묘호가 말해주듯이, 

많은 업적을 남겨 치세를 이룬 훌륭한 군주였다. 

『경국대전』, 『국조오례의』등을 완성하고,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세종 때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세조 때 폐지된 호당(湖堂)제도를 부활하여 독서당을 따로 두고 문신 중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일정기간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다시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완성

 

기존의 여러 법령과 교령을 종합하여 항구적인 법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세조 때 모든 법전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십 수 년간 이어져, 1485년(성종 16년)에 『경국대전』으로 편찬되었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 조직과 정치, 사회, 

경제 활동을 망라하는 기본 법전이 되었다.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바뀌지 않고 조선 왕조 500년여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으로 조선의 정치 제도의 정비 작업은 일단락되어, 조

선은 명실상부한 유교적인 법치국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의 보급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윤리에서 기본이 되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간행한 책이다. 

세종 때인 1431년(세종 13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삼강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고 있다. 

이 서적이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라는 성종의 어명에 따라 1481년(성종 12년) 한글판 『삼강행실도』가 완성, 

보급되어 백성들에게 유교적 윤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왕릉)

 

 

 

 

선정릉 탐방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보는 은행나무 노거수 

노란 단풍이 드는 가을에 오면 멋지겠다. 

 

잠시 재실로 들어가 본다.

 

 

 

 

 

나가는 길에 역사문화관에 들려 이곳의 안내문을 살펴본다.

 

 

 

 

 

 

선정릉은 태릉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큰 손실을 보았다.

세월이 지나 현대화 과정에서 선정릉 주변에 빌딩숲이 들어서며 선정릉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판단하여

신청 목록에서 빼려고 했으나, 유네스코는 개발 과정에서 오히려 지키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여

오히려 추가하도록 권고하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의 조선의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왕정시대에도 극악무도한 왕은 천륜에 따라 폐위시켰다.

이 시대에 분별력 없는 무지한 국민에 의해 무능력자가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못난 사람들이 배를 띄웠으나 분별력 있는 행동으로 그 배의 주인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알아갈 때 많은 유적지와 문화재가 왜놈들의 의해 파손된 걸 알 수 있다.

요즈음 그런 왜놈들과 어우러지는 윤석열 대통령이 하는 일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피해자에게 전범기업이 아닌 우리의 돈으로 셀프 배상하겠다고 하니

김영환 충북지사는 친일파가 되겠다며 날뛰고, 전국 각지에서 친일파가 연이어 발호한다.

게다가 주 69시간제로 근로자나 노동자를 극한의 피로로 내모는 한심한 정책을 하겠다고 한다.

검사들을 대거 중앙정부에 심어 놓으며 왕정시대로 돌아가려는 듯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사망했어도 공식적인 사과 한 마디 없고, 

북한에서 연일 미사일을 쏴대도 꿀 먹은 벙어리다.

지난 1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검사 60여 명을 넘게 투입해 고작 이재명 죽이기에 나선 것 밖에 없다.

국방과 경제가 무너지고 외교도 매번 참사를 빚는 무능한 대통령이 5년을 채우면 우리나라 꼬락서니는 어떻게 변할까?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