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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파주 삼릉과 장릉 탐방

by 즐풍 2020. 9. 3.

 

 

2020.9.1. (화) 오후에 탐방

 

 

은퇴를 앞두고 1년간 휴가를 받아 두어 번 짧게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6월에 3일간 태안해안 국립공원을 처음 밟아봤고, 7월엔 4일간 강원도 고성, 속초, 양양 지역을 다녀왔다.

여행은 여유롭게 삶을 관조하며 지역 명소를 둘러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인데,

짧은 기간에 하나라도 더 볼 욕심에 제법 서두르며 다닌 여행이었다.

 

8월에 창원시에서 짧게는 3박 4일에서 길게는 5박 6일까지 '한 달 살기' 참가자를 모집했다.

신청서를 작성하다 보니 창원까지 오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별로 실익이 없겠다 싶어 포기했다.

때마침 여수에서는 14박 15일간 장기간 여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신청했다.

간절한 염원을 담은 즐풍의 신청이 선정되었으나 코로나-19 확산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여수의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면 9월 1일인 오늘부터 일정이 시작된다.

9월부터 11월까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여행기간을 설정할 수 있어 9월 1일로 신청했었다.

여행이 무산되고 보니 태풍이 올라오는 데다 아직은 날씨가 더워 오히려 잘 됐다 싶다.

다음에 여수에 갈 땐 이사 간 평택에서 출발하므로 편도로 한 시간 반, 왕복 세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오래전에 파주 시내에서 공능 저수지로 가려면 파주 삼릉을 통과하는 게 지름길이었다.

이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위 사진처럼 차도는 매표소 건물이 들어서며 출입구로 쓰인다.

 

입구를 지나면 잔디밭에 반송을 도드라지게 심은 걸 볼 수 있다.

반송은 별로 크지 않고 옆으로 퍼지는 나무라 크게 사랑받지 못한다.

 

파주 삼릉 사적 제205호

 

파주 삼릉은 공릉, 순릉, 영릉이 있는 곳이다.

처음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가 왕세자빈 신분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묘가 조성되었다.

1470년(성종 1년)에 공릉이라 하였다.

이후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순릉이 조성되었다.

영조 대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묘가 조성되었고, 

1776년(정조 즉위)에 진종으로 추존되고 영릉이 되었다.

공릉의 장순왕후와 순릉의 공혜왕후는 자매 사이로 한명회의 딸인 점이 흥미롭다.

공릉: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능

순릉: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

영릉: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쌍릉 (안내문)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기본적인 재실의 구성은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재실은 영릉,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의 능 재실로 조선 후기의 문헌인 "춘관통고"에 의하면

전사청, 제기고, 안향청 6칸, 재실 32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재실과 일부 행랑만 남아 있다.  (안내문)

 

능은 조선시대부터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하여 숲이 좋다.

특히 능 주변이 더욱 그렇다.

 

지역주민이라면 산책하기 좋은 코스인데, 지역주민이라도 이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공릉 입구 홍살문

 

공릉(예종 비 장순왕후) 사적 제205호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로 1460년(세조6년)에 왕세자빈이 되었다.

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7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462년 현재의 자리에 묘가 조성되었다.

이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0년(성종 1년) 왕후로 추존되었고 능 이름이 공릉이 되었다.

공릉은 처음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 무석인이 없이 소박하다. (안내문)

 

공릉 정자각과 비각

 

 

 

앞서 안내문 그대로 소박한 능이다.

 

장명등과 무석인 

 

석양과 석호 

 

장순왕후의 공릉의 신도비 

 

 

 

거위벌레가 도토리에 알을 낳고 가지를 잘라낸 게 많은 보인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도토리 속의 영양분을 먹고 자라게 된다.

 

순릉(성종 비 공혜왕후) 사적 제205호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1456~1474)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1467년(세조 13년) 세조의 손자 자을산군과 혼인하였다.

이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1474년(성종 5년)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순릉은 파주 삼릉에 있는 3기의 능 중 유일하게 왕릉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이는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날 때 신분이 왕비였기 때문에 난간석, 무석인 등의 석물이 조성되었다. (안내문)

 

 

 

이 소나무는 공혜왕후가 잠든 순릉을 향해 절이라도 하듯 누웠다.

소나무가 쓰러져도 공교롭게도 절하는 형태라는 게 신기하다.

 

공혜왕후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 

 

멀리서 바라보는 순릉 

 

 

 

당겨본 순릉은 여느 릉과 달리 문석인이 보인다.

 

다음 여정인 영릉으로 향한다.

 

 

영릉(추존 진종과 효순황후) 사적 제205호

 

영릉은 추존된 진종(1719~1728)과 효순황후 조씨(1715~1751)의 능이다.

진종은 영조의 아들로 처음 경의군에 봉해졌다가 1725년(영조 1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3년 뒤 10살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곳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영조의 명으로 이복 동생 장조의 아들 정조가 입양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진종으로, 1908년(융희 2년)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순황후는 1727년(영조 3년)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이후 현빈에 봉해진 후 1751년(영조 27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황후로, 1908년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영릉에는 3기의 표석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영조 대에 왕세자로 처음 세워진 표석, 정조 대에 왕으로 추존되어 세워진 표석

그리고 순종 대에 황제로 추존되어 세워진 표석이 모두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안내문)

 

순종 대에 황제로 추존되어 세워진 표석, 이때는 조선국이 아니라 대한으로 기록되었다.

 

조선국의 표석

 

왼쪽이 진종릉 오른쪽이 효순소황후릉이다.

왕세자로 책봉된 후 세상을 떠나 장명등과 망주석, 문석인 정도만 놓여 있다.

 

문석인과 석호, 석양

 

 

 

 

 

쌍릉인 영릉 

 

표석이 있는 비각은 앞서 설명한 대로 모두 세 개의 표석이 있다.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양쪽 잔디밭은 배수가 잘 안 돼 습지처럼 물이 고여 있다.

공사가 필요해 보인다.

 

 

 

 

 

 

 

 

 

 

 

파주 삼릉 탐방을 마치고 13km 떨어진 장릉으로 이동한다.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 묘라 단출하므로 고즈넉한 느낌이다.

 

 

 

장릉 입구엔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장릉으로 가는 길이고, 좌우 길은 산책로이다.

 

장릉

 

장릉(長陵) (인조와 인열왕후)

 

조선 제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의 능이다.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는 제14대 선조의 손자이자 추존 원종의 아들이다.

1623년 광해군과 당시 집권당인 대북파를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에 이괄의 난(인조 2년, 1624년)을 수습하였고, 정묘호란(인조5년, 1627년)과 병자호란(인조 14년)을 겪었다.

이후 군비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등을 신설하였고,

북변(함경도 변두리)과 연해의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을 설치하였다.

 

인조 27년(164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본래 묘호를 열조라 하였다가 최종적으로 인조(仁祖)라 하였다.

인열왕후(1594~1635)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로 광해군 2년(1610년)에 인조와 혼인하여

인조 1년(1623년)에 왕비가 되었다.

6남 1녀를 낳았으며 인조 13년(1635년)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내문)

 

장릉은 처음 1635년(인조 14년)에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뱀의 피해가 있자 1731년(영조 7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안내문)

 

 

 

 

 

 

정자각과 비각 뒤로 장릉이 보인다.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능이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이다.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이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첫 번째 당비 신의고황후의 능), 후릉(전종과 장인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안내문)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안내문)

 

 

장릉 탐방을 끝내고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 산책에 나선다.

 

 

 

느티나무

 

우리나라 마을 앞 정자나무의 대부분은 느티나무이다.

오래 살고 가지를 많이 뻗어 쉼터를 충분히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나무는 결이 곱고 황갈색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 일이 적은 데다 무늬도 아름답다.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여 나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장점을 다 갖고 있다.

나무의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안내문)

 

산행 대신 고양시 서삼릉과 파주시 삼릉, 장릉을 탐방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조선왕릉 탐방을 끝내겠다는 생각은 갑자기 평택으로 이사가게 되어 쉽게 끝낼 수 없는 숙제로 남긴다.

기회가 되면 가을에 특별 개방되는 태조의 건원릉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