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0. 일 13:57~17:27(전체 거리 7.8km, 전체 시간 03:30, 휴식 시간 28분, 평균 속도 2.5km/h)
오전에 하남의 검단산, 용마산, 장작산을 연계 산행한 코스가 13.3km나 돼 제법 많이 걸었다.
어느 산이나 오르내리막은 있어도 검단산 등은 무난한 육산이라 견딜만 한 부담이다.
그래도 다섯 시간 산행에 휴식 시간이래봐야 겨우 점심 먹는 시간 12분에 불과했다.
그대로 산행을 마치자니 눈앞에 빤히 보이는 남한산을 포기하기엔 섭섭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단풍 좋은 가을에 남한산성을 찾을 생각은 있으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힘은 부치나 남한산으로 발길을 돌린다.
남한산까지 바로 연결하기엔 거리가 부담돼 일단 버스로 이동해 큰골로 오를 생각이다.
남한산성 면사무소를 조금 지난 버스정류장에서 25분 정도를 기다려 버스에 오른다.
큰골에서 내렸으나 한 정거장 더 가 장경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남한산성 병벽길로 오를 수 있다.
큰골로 쭉 산행하면 한봉을 거쳐 남한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로 더 가면 벌봉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남한산 정상에 갈 생각에 큰골로 내렸으나 왼쪽 능선에 성벽이 보여 벌봉은 포기하고 성벽쪽으로 방향을 튼다.
막상 성벽에 도착했으나 직벽인 성벽을 올라 성벽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마침 왼쪽에 작은 암문이 보여 도착했을 땐 문이 닫힌 게 보여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남한산성 등산코스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이런 성벽을 맨몸으로 오른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바깥쪽은 홍예문으로 된 작은 암문인데 닫혔으니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을 밀면 열리긴 하나 사진처럼 뒤쪽에 큰 나무를 가로질러 다 열리지 않게 막았다.
두 문을 다 열어도 공간이 안 돼 한쪽만 민다.
중간 중간 나무를 덧댄 두께가 제법 돼 한쪽만 밀고 아이폰 측정기로 측정하니 20cm 공간이 확인된다.
카메라와 스틱, 배낭을 벋어 안쪽으로 밀어넣고 겨우 몸만 들어올 정도의 공간이다.
딱 나 정도의 날씬이는 가능하나 조금만 더 체중이 불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다.
바깥쪽 홍예문 돌이 문을 밖으로 열 수 없게 막고 안쪽으로 열어야 하는 데, 중간에 나무로 고정시켰다.
그러니 한두 사람이 막아도 어렵지 않게 문을 지킬 수 있는데, 북한산성에도 이런 문은 많지만 이런 쓰임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남한산성에서 만난 첫 번째 암문으로 이렇게 통과했다.
이 문은 제3암문으로 문을 잠그는 고정목은 받침대로 괴었을 때 의자로 쓸 수 있다.
벌봉 쪽으로 나가는 봉암성 암문 전의 제3암문 사진을 먼저 가져온 것이다.
장경사 쪽에서 들어 온 차량이 주차되어 이곳에서 산행하는 사람도 더러 보인다.
남한산을 빙둘러 용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거 같다.
장경사신지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는 이중의 성벽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신자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가 목적으로 둘레가 159m다.
옹성 끝에는 2개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 저장 시설이 있다.
본성과 연결 지점에 전투 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는 암문이 있다. (안내문)
제2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라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없다.
남한산성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 등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는 암문은 폭이 1.3m, 높이 1.42m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성벽으 견고하게 지탱하기 위해 다소 경사지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성벽을 잡고 오르기도 마땅치 않아 비교적 수비하기 좋은 형태다.
남한산성 군포지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군포는 하나도 없다.
동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1624) 산성 수축 시 설치되었으나 18세기 초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라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은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의 반원형 홍예문이며 폭 2.36m, 높이 2.62m로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봉암성(蜂岩城)
남한상성은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다섯 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다.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에서 북동쪽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때 벌봉을 청군에게 빼앗겨 곤란의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에 봉성암을 쌓았다.
숙종 31년(1705) 포루를 증축하였다.
봉성암은 남한산성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에 있어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성의 길이는 2,120m이다. (안내문)
봉암성은 본성과 달리 성벽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게 다소 흠이다.
현절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삼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 14년(1688)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후에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졌다.
죽어서도 임금을 향한 강직한 선비정신의 상징적 건물로 여겨진다.
지붕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이며 이출목 이익공의 주심포 형식이며 본당 좌우의 방풍막은 아래를 직선으로 자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며 정면 각 칸에는 4쪽의 여닫이 격자문을 달았다. (안내문)
이쪽은 청량산인가?
청량산 개원사 조계문이란 편액이 걸렸다.
조(曺)자의 아래 曰부 위에 있는 東의 변형부를 옆으로 나란히 쓴 변형된 한자다.
개원사에선 가급적 경내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로 왼쪽에 등산로 입구란 표시를 했기에 바로 등산로로 오른다.
남장대터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라 불린다.
제2옹성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 면적을 넓힘과 동시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내임을 알 수 있다.
제2남옹성치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잇도록 한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다.
제2남옹성은 남장대 바로 앞에 있으며 남한산성 치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제2남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에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성벽이다.
둘레가 318m이며,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인 것이 특색이다.
포대는 동, 서, 남 3방향으로 설치되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했다.
남한산성의 옹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제2남옹성으로 나가는 암문
제2남옹성치 성벽
멀리서 조망하는 제2남옹성치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다.
한양의 4대문처럼 남한산성의 4개 문은 좌익문(左翼門 : 동문), 우익문(右翼門 : 서문), 지화문(至和門 : 남문), 전승문 (全勝門 : 북문)이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들과 비슷하다.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이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이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된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지화문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지화문이라 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현재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앞 느티나무(약 350년 추정)와 함께 문화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
지화문 양쪽은 성곽의 상태가 나빠 붕괴 위험까지 있어 보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원만히 보수가 잘 진행되어 완벽한 모습으로 거듭 나길 기대한다.
남한산성 내 소나무 숲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보기 드문 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로 확보하고 땔감으로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져
산성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림조합을 결성하여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하였기 때문이다. (홈페이지 인용)
영춘정
영춘정(迎春亭)은 ‘봄을 맞이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 소나무는 크고 기품이 있는데다 성벽 길까지 감싸 포근한 느낌이 좋다.
드디어 오늘 최종 목적지인 수어장대에 도착한다.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동장대, 서장대, 남장대, 북장대, 외동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
청량산 정상(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 익공식이다.
영조 27년(1751) 2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외부에 ‘수어장대(守禦將臺)’ 내부에 ‘무망루(無忘樓)’라고 편액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안내문)
수어장대 담장 한 쪽엔 이렇게 바위가 있는데, 수어장대란 한자가 음각되어 있다.
무망루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었다.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이름이다.
우측 나무는 이승만 대통령이 식재한 나무인데, 태풍이 불면 쓰러질 염려가 있으므로 다른 데로 옮기는 게 좋겠다.
수어장대 측면
소나무와 수어장대
수어장대를 지키는 거대한 소나무
청량당 맞은 편 쪽문과 향나무
청량당(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남한산성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서 억울한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했던 이회의 원혼을 달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라고 전해온다.
‘대감당’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남한산성을 ‘청량산’이라고 불렀던데서 기인하여 공식적으로 ‘청량당’이라고 칭한다.
이회장군과 그의 처첩, 벽암대사의 초상화가 안치되어 있다.
청량당은 서장대 서편 1단을 내려서 지어져 있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 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문을 달고 좌, 우측 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안내문)
남한산성 옛길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후기 10대로 중 하나인 봉화로의 일부 노선으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 중 하나였다.
봉화로의 일부 구간과 주변의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들을 연결해 탄생시킨 것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러 갈 때, 보부상들이 보따리를 지고 인근 장터를 떠돌 때,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할 때 지나던 길이었다.
이처럼 남한산성 옛길은 지난 시절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동서남북 4개의 특색 있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동시에, 바쁜 일상생활 속 휴식의 기회를 가져보자. (안내문 편집)
서문
남한산성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했다.
행궁에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한 것이다.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 서쪽은 경사사 급해 물자 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수어장대를 빠져나와 잠시 밖에 있는 안내문을 읽을 때 일몰 15분 전이란 알람이 울린다.
서둘러 하산하는 길에 만난 청국사는 문이 잠겨 밖의 풍경만 찍는다.
남한산성 옛길
“남한산성 등산의 매력은?”
일제강점기부터 등산객의 많은 사랑을 받은 남한산성의 매력은 무엇일까?
남한산성은 약 세 개의 산에 걸쳐 축조되어 있는 성곽이다.
남한산성의 최 고봉인 남한산(552m)은 수도권 남부지역 주민들이 새해가 될 때마다 해맞이 하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많은 등산객들의 평가에 따르면 남한산, 청량산 두 곳 모두 해돋이를 보기에 일품인 장소라고 한다.
등산과 함께 남한산 성의 역사유적을 즐기는 방법으로 산행을 겸한 문화재 순례가 가능하다.
다양한 등산코스들이 많고 자연경관이 우수한 남한산성은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전후,
그리고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등 산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이후 남한산성은 다양한 문화유산, 잘 보존된 우수한 자연환경,
서울과 수 도권 도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접근성 덕분에 많은 시민들의 각광 받고 있다.
오전에 검단산, 용마산 장작산을 종주하고 잠깐 짬을 낸 남한산성이 오히려 주가 된 느낌이다.
남한산성의 내용은 대체로 산성에 설치된 안내문이거나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의 안매문을 가져온 것이다.
시간을 내 행궁을 제일 먼저 다녀왔어야 했는데, 수어장대를 염두에 두다보니 행궁은 놓쳤다.
단풍이 곱게 물든 어느 가을에 다시 찾아야겠다.
해 짧은 겨울 아침 6시에 집을 나서 검단산, 용마산, 장작산 산행에 이어 남한산성까지 서둘러 산행을 마쳤다.
오늘 산행 거리는 21km로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거리에 조금 못 미친다.
산행 거리는 제법 길어도 설악산 산행의 1/5 정도의 노력만 있으면 가능한 산행이니 어려울 것도 없다.
오전 검단산이 궁금하면 ☞ http://blog.daum.net/honbul-/1376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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