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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전등사를 품은 강화 삼랑성은 정족산성으로도 불려

by 즐풍 2023. 10. 31.

2023_170

 

 

 

2023. 10.13. (금)  08:11~10:07, 2시간 7분 탐방, 8분 휴식

 

 

강화도에 있는 여러 산성 중 코스가 전등사를 감싸 비교적 작은 삼랑성을 탐방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아 붙여진 삼랑성 三郞城은 전설을 뿐 믿기는 어렵다.

삼국시대의 건축 기술이 확인되어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만큼 오래된 성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삼랑성은 점점 더 단단한 요새로 변한다.

 

하루 잠깐 강화도에 들어선 관광객이라면 전등사 관광만 끝내고 삼랑성을 돌 시간은 없겠다.

힘든 산행보다 볼 곳은 널렸으니 어딜 가도 좋은 강화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삼랑성 탐방을 고집하는 건 규모가 작아 잠깐이면 충분하다.

산성을 끝내고 잠깐 전등사를 살피면 일석이조의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삼랑성 남문인 종해루

 

 

강화 삼랑성 三郞城 (남문 방면) |  Samnangseong Fortress, Ganghwa

사적 제130호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假闕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현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다.

동문 안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양현수 승전비가 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병인양요: 고종 3년인 1866년 흥선대원군의 친주고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침범한 사건

 

 

This fortress is also known as Jeongjoksanseong Fortress. It is unknown when it was first built.

However, according to a legend recorded in the History of Goryeo (Goryeosa),

this fortress is said to have been built by the three sons of Dangun - the mythical founder of Korea's

first ancient kingdom, Gojoseon.

A number of important places have been built within the fortress walls over the past millennia.

In 381, Jeondeungsa Temple is said to have been founded here.

During the Goryco period (918-1392), palaces and government buildings were built here

when Ganghwado Island was the temporary capital (1232-1270).

And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two repositories were built here,

namely Jeongjoksan National History Archives and Seonwonbogak Hall, to store copies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genealogical records of the royal family, respectively.

This fortress was also the site of a battle during the French campaign against Korea in 1866.

France had sent a punitive expedition to Korea in retaliation for the execution of French Catholic missionaries

who had been promoting Christianity in the highly neo-Confucian country.

Around 160 French troops were defeated here by soldiers led by general Yang Heon-su (1816-1888).

                                                                                   (안내문)

 

 

 

 

 

 

 

 

 

삼랑성에서 울린 승전보


1866년 10월 16일,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 앞바다에 출현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한 해였다.

이 사건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 있던 프랑스에게 강제 개항의 빌미를 주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보이는 갑곶돈은 이제 여유롭게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곳이자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다. 

처음 강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곳을 점령하지만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선의 반격은 매서웠다. 

삼랑성 안 전등사에 진을 친 조선은 양헌수(1816~1888) 장군이 이끄는 강계 출신의 포수 500여 명으로 

프랑스군을 크게 이긴다. 
조선의 승전보가 울린 삼랑성의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걷는다. 

이끼와 덩굴에 뒤덮인 성벽이 가파른 산길을 끼고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낯설기만 한 푸른 눈의 군대에 맞서 조선을 지켜낸 성벽들이 지금도 단단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삼랑성에서 조선군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강화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프랑스군을 무사히 쫓아낸 것은 다행이었으나, 어쩌면 이때 조선은 스스로 힘을 과신하면서 외세에 대비할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굳게 걸어 잠근 빗장을 풀고 단계적으로 세계와 교류를 시작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 초지진으로 걸음을 옮긴다.

초지진은 둘레가 500미터 정도로 규모는 작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입구 부근에서는 성벽에 남아 있는 포탄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은 오랜 시간을 건너 싸움의 현장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전투는 초지진에서 멀지 않은 광성보, 덕진진으로 계속해서 번져간다.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곳은 광성보인데,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면서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육박전이 벌어졌다.

당시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은 열세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 
광성보 안에 있는 신미순의총은 당시에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미 해병대의 기록에는

“우리가 전투에는 이겼으나, 아무도 이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전투를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1년의 조선 원정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전이다.

우리는 물리전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정신전에서는 졌다”라는 대목이 남아 있다.

적군마저 숙연하게 한 그들의 결의 앞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도난당한 국가의 보물


광성보에서 내려다보는 강화의 바다는 이제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을 침략한 이들이 보물들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군이 자국으로 돌아가기 전 책과 문서를 마구잡이로 약탈해 간 외규장각은 비운의 장소다.

지금은 크게 볼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왕립 도서관으로 1,000여 종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가져간 책 중에는 왕실의 각종 행사를 빠짐없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가 있었다. 

이는 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지만, 우리는 민족의 보물이 프랑스에 도난당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기록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보니 모두 불타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화재 반환, 그 험난한 길


외세의 침략이 시작된 이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반출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고려나전경함’, ‘경천사 십층석탑’ 등도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문화재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에 있다고 하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외규장각 의궤’ 역시 힘겹게 한국에 돌아온 문화재 중 하나다. 
오랫동안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의궤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1975년.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고(故)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지하의 먼지 속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감동적인 조우였다.

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문화재인데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만 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박병선 박사가 그간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하자 시민단체와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145년 만의 귀환


2011년, 이 땅을 떠난 지 145년 만에 마침내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귀환은 아니었다. 

양국이 소유권은 프랑스가 갖되 5년간 빌려주면서 기간을 연장한다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이 아니니 소장인도 찍을 수도 없고, 지방 전시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프랑스 측에서 기간 연장을 거부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소식에 박병선 박사는 “내가 책이라면 울면서 한국으로 갈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외규장각 의궤와 같은 불법적인 약탈뿐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에 눈먼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을 떠나는 문화재도 많다는 점이다.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이다.

당장 모든 문화재를 회수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에 있건 우리 문화재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내야 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_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서울 인천 경기권에서 발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따라 천주교도들도 대거 학살되며 프랑스 선교사도 함께 순교했다.

이를 빌미로 한양의 길목인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의 외규장각에 있던 서고를 싹쓸이해 갔다.

세월이 흘러 그 존재조차 모르던 서류들은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고 박병선 박사 덕분이다.

박병선 박사는 유학을 마치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13년간 사서로 근무하며 세계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노력의 단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박병선 박사에게 사표를 받았음에도 개인 자격으로 도서관을 드나들며 

왕 전용서적인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것이다.

여성이란 섬세함과 끈질긴 그의 노력의 결과, 영구대여 방식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독일 구텐베르크 인쇄물에 빼앗길 뻔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타이틀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왕만 보는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내 복사본인 분상용 어궤보다 절대적 가치가 큰 어람용 어궤를 되찾은 것이다.

이젠 고인이 된 고 박병선 박사님께 감사와 함께 평안한 영면을 기원드린다.

 

 

 

 

 

삼랑성은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처럼 현대식으로 복원하면서 양복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지 않고

처음 쌓을 때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보기 좋다.

 

 

 

산이 생긴 그대로 곡선을 따라 성벽이 이어지므로 자연적인 치성의 형태를 갖는다.

 

산성의 높이나 소나무 크기가 비슷할 만큼 성벽이 높다.

 

 

 

성벽이 높은 만큼 산성 위로 여장을 쌓지 않았다.

 

산성 안쪽으로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는 곳도 있다.

 

 

 

산성 안쪽에 바위로 된 전망대가 보여 전등사 전경을 담을 수 있다.

 

대문을 걸어 잠근 서문

 

대문이 없는 이 성문은 성 밖으로 드나들 수 있다.

 

 

 

 

 

이 모서리에는 성 안에 빗물을 빼는 배수로가 상단에 설치되었다.

 

 

 

성이 무너진 곳을 예전에 쌓은 그대로의 방법으로 복원 중이다.

공사 중이라 출입이 금지된 곳이기에 옆으로 돌아가던 중 공사관계자 분들의 휴식 장소를 만났다.

그때 휴식하시던 분들과 조우하니 커피를 주시면서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사는 덴 어디냐. 고향은 어디냐며 환담을 나누다 보니 동향인 고향 분을 한 분 만났다.

그분이 공사 중이라 돌아가는 게 맞지만 더 위험할 수 있으니 공사현장으로 조심스럽게 가시라고 한다.

고향 사람 덕분에 숲을 가로지르지 않고 쉬운 길로 가게 되어 고마운 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전해드린다.

 

 

이곳은 눈이 내린 듯 보이는 하얀 시멘트를 발랐다.

눈, 비가 성벽으로 스며들며 붕괴되는 건 막겠지만 너무 성의 없는 처사로 여겨진다.

 

겨우 한 사람 드나들 정도의 작은 암문도 보인다.

 

이곳도 한 군데 성벽이 붕괴되어 출입을 막아 놓았다.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니 이곳도 함께 곧 공사를 하겠다.

 

어제만 해도 좋던 날씨가 오늘은 잔뜩 흐렸다.

 

 

 

 

 

성벽이 휘돌아 가는 곳은 치성처럼 양쪽으로 감시하기 좋은 곳이다.

이런 곳은 감시초소처럼 여장을 높이면 활용도가 더 클 것이다.

 

동문으로 내려가는 이곳 성벽은 복원한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성 밖으로 보이는 전등사 일부 

 

양헌수 승전비 梁憲洙 勝戰碑가 모셔진 비각

 

잠깐 동문 밖으로 나가 예전 매표소 자리에 있는 안내원에게 이게 무슨 문이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분이 동문이라고 알려주신다.

안내원이 오늘 처음 온 사람도 아닐 텐데 동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주인정신이 없다.

 

이곳은 전등사사 가까우니 성벽 위로 무수히 많은 돌탑이 쌓였다.

돌탑 하나하나에 작은 소망이 깃들었을 테니 모두 그 소망이나 소원을 성취하시길 바란다.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삼랑성을 한 바퀴 돌았다.

국사시간에 배웠던 정족산성 서고와 관련된 일화를 한 번 더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작은 섬에 불과한 강화도는 몽골의 침입 이후 개회기까지 많은 곤욕을 치른 곳이다.

변변치 않은 무기로 외세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투에서는 졌어도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곳이다.

(삼랑성은 별도로 포스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