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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 둘러보기

by 즐풍 2022. 10. 13.

 

 

 

2022.9.27 (화) 오후에 고창읍성 탐방 후 잠깐 들림

 

 

여행할 땐 필수 코스에 한두 개씩 같이 봐야 하는 코스가 있다.

고창읍성 입구에 있는 신재효 고택이 그렇다.

신재효 선생이 안 계셨다면 우리나라 판소리가 후세에 제대로 전래되거나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공이 크다. 

그분이 우리나라 판소리가 체계적으로 정리하셨기에 많은 작품이 집대성되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 고창 신재효 고택 (高敞 申在孝 古宅) 국가 민속문화재 제39호

 

이 집은 신재효의 대저택인 동리정사의 사랑채로 조선 철종 때인 1850년에 처음 지었고 1899년에 고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본래 동리정사는 13,000여㎡ 대지에 안채와 14칸 줄 행랑채 등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마당으로 수로가 흘렀고 거대한 석가산이 있어 운치 있는 집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신재효(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 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변강쇠 타령)> 등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였다.

이전까지 일정한 체계나 순서 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모아 사설의 체계를 잡아 개작하고 통일한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요,

연출가로서 판소리 사설(타령)을 창작하고 집대성한 인물이다.

신재효는 향리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천대받던 판소리꾼을 교육하고 예술 활동을 후원하였다.

판소리를 국문학의 정수로 끌어올렸다.

이 집은 특이하게 원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다.

건축 당시에는 모두 원기둥이었는데, 암행어사가 신분에 맞게 법을 지키기를 요청하자

어사의 체면을 살려주고자 집을 낮추고 뒷 기둥을 격이 낮은 사각기둥으로 고쳤다고 한다.

                                                                                                                                       (출처_문화재청)

 

 

 

사주문을 이엉을 보면 몇 년에 한 번씩 몰리며 세월의 두께를 더했다.

그러다 보니 가분수처럼 지붕이 거대한 모양을 취해 어색한 느낌이다.

다음엔 대부분의 이엉을 거둬내고 다시 올려야 제대로 된 모습이 나올 것이다.

지붕을 걷어내자니 일만 는다고 생각해 계속 쌓아두는 어래석은 행태의 반복이다.

 

 

굴뚝을 제법 멀리 뺐다.

 

판소리 이론가면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1812∼1884)가 살던 집이다.
철종 1년(1850)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며 광무 3년(1899) 그의 아들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소담한 초가집 사랑채로 보고 있는데 중요 민속자료 지정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

지금 건물은 많이 개조되고 변형된 것을 국가에서 관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고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앞면 6칸·옆면 2칸 규모에 '一'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구성은 앞에서 볼 때 왼쪽부터 부엌 1칸, 방 2칸, 대청 1칸, 2칸을 합하여 통 1칸으로 만든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엌을 뺀 나머지 앞면 5칸은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과 방 사이에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든 점과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은 점이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끈다.

현대 판소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명인(名人) 신재효의 옛 집으로서 가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지금은 쓰이지 않는 우물

 

 

 

 

지금은 행랑채인 이 초가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예전에는 삼천 평이 넘는 집터에

안채, 사랑채 등 여러 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전국의 많은 명창이 모여들어 장단에 맞추어 판소리를 공부한 것이다.

개인이 후원하고 후학을 기르는 판소리 문화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이 초가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얼이 배어 있는 이곳의 민족정기를 말살할 목적으로 연못을 메워 고창경찰서가 들어섰다.

물론 건물 대부분을 없앴으나 이 건물 한 채만 복원하여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했다. 

 

 

□ 신재효 판소리 사설본 (申在孝 판소리 辭說本)

 

동리 신재효(1812∼1844)는 고창의 아전 출신으로 판소리를 후원하고 집대성하여 

19세기 판소리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을 고창지역 후손과 이웃들이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필사한 사설본 27점의 자료가 전하며, 

필사자 별로 나누면 1898년 <춘향가> 를 포함한 성두본(星斗本) 5종 8책, 신씨가장본(申氏家藏本) 5종 5책, 

고수 와촌본(瓦村本) 2종 2책, 청계본(淸溪本) 9종 12책 등이다. 

 신재효 판소리가 고창 지역 향반층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으며, 

김창환, 김소희, 김연수 등의 근현대 명창들의 사설에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후기 완판본 한글 고전소설인 열여춘향슈졀가, 심쳥가, 퇴별가, 화룡도(적벽가) 등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본 사설본은 신재효의 원본에서 파생된 필사본들로서 문헌학적으로 원전(原典)으로 평가되고 있어 

자료의 희소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_문화재청)

 

 

 

고창 출신인 신재효는 상속받은 재산이 많은 데다 재산을 늘리는 데도 탁월하여

40이 안 돼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가산이 넉넉해지자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며, 판소리 연구에도 몰두했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한 공로로 1876년(고종 13)에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절충장군을 거쳐 호조참판으로 중추부동지사를 겸직했다.

이와 같이 백성을 구조한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그의 문하에는 김세종, 전해종, 진채선, 허금파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진채선은 즐풍이 현재 고창 살기 하고 있는 심원면 사등마을에 생가가 있으나 건물은 존재하지 않고 터만 남아 있다.

진채선 생가터는 추후 포스팅할 예정이다.

이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진 경회루를 복원한 후 많은 연회를 열었다.

이때 고창의 명창인 진채선도 이곳에서 창을 부르기도 했을 만큼 유명했다.

최근 이 고장을 다니다 보면 당시 신채효의 문하생이었던 김소희와 진채선의 생가터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그러니 고창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중흥기를 연 곳이기도 하다.

 

예전 10,000원권 회폐 뒷면에 있는 경회루 사진

 

 

판소리박물관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바자울 문이다.

문 안쪽에 대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한다.

 

 

신재효 고택은 부득이하게 달랑 한 채만 복원했다.

주변에 도로가 생기고 판소리박물관까지 들어서며 복원할 공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사전 지식이 없는 한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생가를 둘러보니 예전의 웅장한 모습은 간데없고 달랑 초가 한 채라 마음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