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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인 부소산성 재탐방

by 즐풍 2023. 6. 30.

2023_106

 

 

2023.6.19. (월)  11:31~13:56, 2시간 24분 탐방, 26분 휴식, 5.3km 이동

 

 

지난번 부소산성에 왔을 땐 서산에 해가 걸렸을 때라 탐방을 끝낼 땐 어둑어둑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늦은 시각의 탐방이라 서두른다고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어제는 하루종일 걷고 또 걸었더니 오늘은 힘이 달린다.

어느새 6학년이 되고 보니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내일까지 여행할 생각을 접고 부소산성을 마지막으로 탐방하고 귀가해야겠다.

젊을 땐 속절없이 허송세월하고 50대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갈 길은 먼데 어느새 해가 저문다.

 

 

부소산성 탐방코스

 

 

 

ㅁ 백제의 역사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 부소산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 있는 해발 106m 고도를 가진 부여의 진산이다. 

평지에 돌출하였으며,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았다. 

부소산의 산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이며,

부소(扶蘇)는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부소산은 평소에는 백제왕실의 후원 구실을 하였으나 전시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장소가 되었다.
부소산 내에는 군창지,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 고란사 등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 

산재해 있으며,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산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출처_부여군청, 문화관광)

 

부소산성은 매표 후 정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한다.

 

 

 

 

ㅁ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 

왕궁을 짓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던 곳이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했을 때와는 달리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는 백제 성왕의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에 대해서는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의 왕성구조에 대하여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관북리유적은 백제의 새로운 수도, 사비에 조성되었던 유적이며 확인된 유구의 규모와 특징으로 보아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다. 

관북리유적에서는 대형건물지, 대형목곽수조, 저장시설, 연못 등이 조사되었다. 

대형건물지는 중층의 누각건물로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북리유적에서 가장 큰 건물터이다.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익산에도 왕궁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관북리유적에서는 또한 4m 크기의 대형 목곽수조 두 곳이 발견되었으며, 

수조와 함께 수도관 등의 배수시설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나무로 만든 목곽고와 돌로 만든 석곽고 등의 저장시설이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서 야채와 과일 씨앗 등이 확인되어 백제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부소산성은 관북리 유적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평소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표고 106m의 부소산 정상에 축조되었다. 

산성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도 이 안에 있다. 

1993~1994년에 걸쳐 실시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계곡을 품으면서 외곽을 두르는 백제시대 성벽, 

그리고 그 안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부소산성 성벽의 축조방식은 이른바 판축기법인데, 판축기법은 부여 나성의 축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산성 내부에는 백제~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지, 석축, 저수조, 목책열 등 다양한 유구가 노출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부소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1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출처_백제세계유산센터)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  충남 기념물 제161호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는 목탑지 기단 심초석에서 금동제과판이 출토됨에 따라 왕실의 기원사찰로

여겨지는 백제시대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중문지, 탑지, 금당지가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한 방식으로 주위에는 금당지의 좌우에 있는

동서회랑과 중문지에 연결되는 남회랑이 구획된 형태이다.

이곳에서는 소조불상,  연화문수막새, 벽화편 등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부소산은 산이 나지막하지만 북서쪽 금강변으로 가파른 낭떠러지가 많다.

금강은 일종의 해자 역할을 해 도 다른 성벽인 셈이다.

동남쪽 외곽에 약 8km에 이르는 긴 외성이 하나 더 있는 특별한 곳이다.

 

부여 나성이 궁금하면...  

 

세계문화유산인 부여 나성 살펴보기

2023_105 2023.6.19. (월) 오전에 한 시간 탐방 부여 나성을 찾기 위해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왔으나 안내판과 안내지도만 있을 뿐 찾을 수 없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도 찾을 길이 없어 마을 주민집까

electee.tistory.com

 

 

 

 

 

 

백화정 (百花亭)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문화재청)

 

낙화암 전망대는 백마강 조망이 좋다.

백제가 멸망하자 절개가 강한 궁녀 몇 명이 비분강개하여 백마강으로 몸을 던져 죽은 곳이다.

나라가 망하면 이렇게 힘없는 백성이나 궁녀가 먼저 희생을 치르게 되니 안타까운 일이다.

 

 

낙화암  충남 문화재자료 제110호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는 50m 정도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강물에 이르러 한 번 꺾인 단이 있다.
이 단을 이룬 암벽에 송시열이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때 궁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할 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부여성 북쪽 모퉁이 큰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순절하여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궁인을 꽃에 비유하여 이곳을 낙화암으로 불렀다 (안내문)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과 백화정이 한눈에 보인다.

안내문에 있는 사진을 가져왔다.

 

백화정에서 백마강 방향에 있는 고란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고란사 (皐蘭寺)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 좌안(左岸)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寮舍)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안내문)

 

대웅전인 극락보전

 

삼성각

 

 

고란사를 둘러보고 다시 백화정을 통해 부소산성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중간에 샛길이 보여 샛길로 접어든 후 능선을 만나며 제법 큰 누각이 보여 올라왔더니 사자루다.

사자루 누각 뒤편에는 백마장강이란 한자가 보기 좋게 걸렸다.

白馬長江(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은 해강 김규진(金圭鎭)이 쓴 글자이다.

 

 

사자루(泗泚樓)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개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_문화재청)

 

아래 인용한 한국고고학전문사전에 보면,

"삼국사기에 의하면 나성 내부를 포함하여 사비성(泗沘城)이라는 명칭으로 하고, 이를 도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 한다.

사자루(泗泚樓) 편액은 조선 후기 의친왕 이 강이 쓴 것으로 자는 언뜻 보면 자와 닮았다.

한자 단어를 찾아보니 泗泚水는 삼국시대에 백마강인 泗沘水를 이르던 말이라고 한다.

사비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 지금의 부여를 의미한다.

泚와 沘는 둘 다 "강 이름 비"라 하니 의친왕은  자를 써 의미를 더 강하며 바꾸는 역할을 했다.

 

사자루 2층 누각으로 올라가 잠시 쉰다.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사적 제5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번지 일대와 구교리, 구아리에 걸쳐있다.

산성은 서편 정상부(해발 106m)에서 동북편의 계곡과 능선을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백제 마지막 도성의 왕성(王城)으로서 산성의 동북 편과 서편으로는 나성(羅域)이 연결되어 있다.

나성과 함께 내·외성을 이루고 있어 서로 보완적 기능을 하고 있다.

나성은 도성의 외곽성이며 부소산성은 왕성으로서 내성의 성격을 지녔다.

성왕 16년(538)부터 의자왕 20년(660)에 이르기까지 122년간 유지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서편의 정상부와 동편의 군창지를 중심 한 곳에 일부 성벽을 보완하여 축소된

상태로 두 곳을 경영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후 조선 태종 때 부여현 관아가 부소산 남측 기슭에 자리를 잡으면서 부소산성 중군창지를 중심으로

다시 성벽을 축소·보완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남측의 3면은 백마강이 에워싼 지세로서 부소산성의 입지는 천연적인 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성 주변의 관방유적으로는 동쪽 3km 지점에 청마산성(靑馬山城), 북쪽 2km 지점에는 울성산성(蔚城山城),

북서쪽 6km 지점에는 증산성(甑山城), 동남쪽 7.5km 지점에는 석성산성(石城山城), 남쪽 10km 지점에는

성흥산성(聖興山城) 등이 축조되어 있다. 왕성 수비체제를 목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소산성의 서측은 가장 높은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외곽으로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형성되어 있다.

정상부 주변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고 그 남측과 동편으로 점차 낮은 지형을 따라 성벽을 조성했는데,

성벽은   대부분 해발 70~75m 내외의 비교적 경사가 심한 지점을 따라가면서 구축되었다.

동북쪽 지형은 점차 낮아지면서 계곡과 작은 평지, 완만한 경사지가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다.

성벽은 이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두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평지까지 이어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동·서 양쪽 끝자락에 따로 두 곳의 성벽을 쌓았는데,

모두 백제의 성벽을 일부 다시 높이거나 양측 면을 보축한 것이다.
부소산의 백제 성벽은 토성이다.

백제의 성벽과 직접 관련되거나 동 시기에 존재했던 유적으로는 치성(雉城) 장대지(將臺地), 남문지,

동문지, 건물지, 목책 혼적, 원형 및 사각 저장고, 원형 저수조, 부석렬(數石列), 사찰지 등이 있다.


백제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2,495m, 너비는 580~650cm 내외이다.

성벽을 축성하는 방법은 먼저 토성벽 중앙은 너비는 대략 360cm로 하고, 그 양측(횡방향)에 목주를 세운다.

종방향의 목주 사이에는 판자를 끼워 넣어, 판축시 흙이 양쪽으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중앙의 성벽 즉, 체성부가 완성되면 체성의 양측 역시 보조 성벽을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치성은 동문지의 남측과 문지의 서편 쪽에서 확인되었다.

동문지 주변의 치성은 위치가 좋아 성외부는 물론 백마강 너머 멀리까지 조망되는 곳이다.

남문지에서 서편으로 약 40m 지점에 위치한 치성은 잔존 높이가 거의 5m에 이른다.

치성의 조성기법 역시 판축에 의한 기법으로 대단히 정치한 판축 방법을 동원하여

목주와 횡장목(橫長木)의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이는 당시 토성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백제 건물지는 여러 곳에서 조사되었다.

서문지로 알려진 광장 쪽에는 잔존길이 36m, 너비 8m 내외의 건물지가 있다.

이 건물지는 굴건주(掘建柱)로서 잔존한 상태로 보아 대형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창터로 알려져 있는 곳은 동편 능선 정상부 중 가장 높은 곳이면서도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 군창터와 접한 서측과 동편은 한 단정도 낮은 곳에 또 다른 넓은 공간에서도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곳 군창터에서는 백제 건물터, 통일신라 및 조선시대의 건물지까지 여러 시대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부소산성 서편 기슭에서는 백제 사찰이 성벽 내에서 발견되어 1942년에 1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 남쪽부터 중 문지, 목 탑지, 금당지가 배치되었고, 이를 에워싼 회랑지가 있다.

회랑의 특징은 기단을 석재대신 와적기단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다른 건물지와 다르다.

건물지는 백제의 특유의 치석 된 화강암을 기단석으로 다듬어 사용하였으나, 대부분의 석재는 없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토성벽 중 동편 성벽은 동서로 길게 구축되었다.

총연장 길이는 1,576m로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와 유물은 대부분 이 성벽 안과 주변에서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치성의 특징은 이를 구축하기 위한 목주를 심기 위한 구멍이 3개가 한 세트로 구성된 점이다.

북문지 양측 성벽의 특징은 두 성벽을 어그러진 방향으로 잇대어 중앙에 문루(門樓)를 설치하였다.

이는 성벽의 발전된 양식으로 옹성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조선시대 성벽은 통일신라시대의 성벽 중 군창지를 포함한 구간만 보완하거나,

새로 구축하여 좀 더 축소된 공간을 활용하였다.

군창지에서 서편으로 약 40m 지점의 낮은 곳에 남북으로 196m의 토성벽을 새롭게 축성했다.

조선시대에 가장 축소되었던 성벽은 총 연장길이 942m로 측정되었다.

조선 태종대에 부여현 관아를 부소산성 남측 기슭에 건립하면서 함께 경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유물은 각종 토기류, 전쟁 시 사용되었던 찰갑, 도, 화살촉, 마름쇠, 창, 대형낫, 갈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연화문, 태극문, 소문(素文) 등 절터와 각종 건물지, 성벽문지 주변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암막새는 시원적인 양식이다. 백제 기와의 특징 중의 하나인 인장와가 출토되었다. 

백제 토기류는 삼족토기, 시루, 대부완, 대형 옹기,  양이호 등 다양하면서도 수많은 토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에는 7세기경 당나라의 청자양이호(靑瓷兩耳壺), 청자완(靑瓷碗)이 포함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기와 중에는 대당(大唐) 명 수막새, ‘회창칠년정묘년말인(會昌七年丁卵年末印: 847년)’ 명

평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수십만 점 이상의 평기와가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물로는 많은 암·수막새, 명문 기와, 평기와류가 있다.

토기는 대형 옹, 뚜껑, 완, 융기문병, 주름무늬병, 납석제용기, 중국 월주요계의 청자 등이 조사되었다.

또 9세기 경의 중국 청자관은 통일신라시대의 여러 건물지에서 적지 않은 양이 확인되었다.


고려~조선시대의 유물은 토기, 병, 청자, 분청사기, 백자, 청동제접시, 자물통, 철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대의 유물은 대부분 군창지를 중심으로 주변의 동시대 건물지에서 출토되어 극히 일부분의 축소된 성이

경영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부소산성의 백제 당시의 정확한 명칭은 아직 고증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나성 내부를 포함하여 사비성(泗沘城)이라는 명칭으로 하고, 이를 도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백제가 마지막으로 천도했던 왕성의 기능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여주(扶餘州)에서 부여군으로 행정을 축소했어도 성벽의 필요성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기능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편집)

 

 

부소산성 | 장대지


장대지(將臺址)는 군사 지휘를 하던 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터이다. 
부소산성 장대지는 통일신라시대 테뫼식성 동쪽 끝지점에 성벽과 직교하여 위치한다. 

지형상 주위를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해당하는데, 적의 침입이나 동태를 파악하는데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풍화암반층을 계단식으로 깎아 단을 조성한 후 장대지를 축조하였는데,

현재 잔존길이는 315cm, 잔존높이는 200cm 정도 된다.

파괴가 심하여 본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장대지 하단에 너비 60~110cm, 높이 25~30cm 정도의

잘 깎은 장대석을 놓고 석재를 들여쌓은 양상이 확인된다.

장대지 남쪽에는 원형의 기둥구멍과 함께 성벽과 나란하게 시설된 배수시설도 확인되었다.  (안내문)

 

 

 

부소산성 | 북성벽 치


치는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부소산성 북성벽 치는 1998년 성벽조사에서 확인되었는데, 북문지 서쪽 성벽과 직교하여 남북으로 축을 이루고 있다.

풍화암반층의 경사진 바닥면에 흙을 다진 후 그 위로 크고 작은 할석들을 이용하여 석축 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잔존 규모는 높이 약 1.7m, 길이 9.6m 정도이다. (안내문)

 

 

부소산성 백제동문지


백제시대 축조된 포곡식 산성의 동문지이다.
1988~1991년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외견상 토로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며, 적심을 놓고 얹은 돌쩌귀가 조사되었으나,

문지를 구성하는 적심이나 초석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동문지 주변을 성토하면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짝을 문설주(기둥)에 달아 여닫는데 쓰이는 시설물 (안내문)

 

 

부소산은 나지막하고 주변에 많은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건물을 짓기 위해 임도를 낸 곳이 많다.

 

 

 

 

통일신라시대에 견고하게 다져진 판축토층을 쌓고, 조선시대에 그 바깥 부분을 석재로 보강한 성벽이다.

성벽의 너비는 8.3m, 높이는 33.75m(?)이다.

성벽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채취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 축정치가 기원후 690~900년 경을 가리키고 있어

성벽의 축조시기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준다. (안내문) 

 

토성은 유려하게 뱀이 꿈틀거리듯 이리저리 길을 내며 이어진다.

 

 

 

석축이 무너지면 남은 토성도 무너지기 마련인데, 토성은 조금 낮아지긴 해도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부소산성 전체를 버려면 한나절 잘 걸린다.

전체를 보기엔 시간이 너무 걸려 그저 크게 돌뿐이다.

 

 

 

사람들은 성벽 위로 걷기를 좋아한다.

부소산성은 성벽 위로 생긴 이런 오솔길을 걷는 재미가 있다.

 

 

 

일부 구간은 성벽 아래에 야자 매트를 깔아놓기도 했다.

 

남문지가 생긴 곳은 성벽이 일부 단절되기도 한다.

 

 

남문지

 

남문지는 문지건물과 출입계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문지건물에서는 기둥자리 4개소가 확인되었다.

출입계단은 건물 유구 남측으로 바로 이어지며 전체 5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문지와 성벽의 연접부는 커다란 석제로 마감하였다. 문지는 추후 동편으로 확장되었다. (안내문)

 

부소산성은 숲이 좋아 그늘이 많다.

햇빛 따가운 날도 이 숲을 걸으면 시원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부소산성을 두 번째 탐방하며 눈에 익은 지형이 많아 친숙한 느낌이 든다.

서울을 점령하던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공주로 도읍을 옮기고, 다시 부여로 밀렸다.

부여에서 마지막 순간을 지키던 백제는 부소산성으로 부족해 밖으로 부여 나성을 외성으로 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청마산성(靑馬山城), 울성산성(蔚城山城), 증산성(甑山城), 석성산성(石城山城), 

성흥산성(聖興山城)에 이르기까지 많은 산성이 있었지만 끝내 무너졌다.

처음엔 정사를 잘 돌보던 의자왕이 대외정세에 둔감했는지 제 역할을 못하며 계백장군의 분전에도 나라를 잃었다.

러시와와 맞서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면 1주일을 버티지 못할 것이란 서방의 예측을 비웃으며

지금도 나라를 지키고 있다.

코미디언이던 그가 대통령이 되자 한 때 토픽감으로 세계를 달궜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전투복을 입고 국민들과 함께 전쟁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에 그들은 똘똘 뭉쳤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가?

우리 정부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 잘못된 건 오로지 전정부 탓으로 돌리는 형편없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