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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서원과 산지승원

경주 옥산서원과 자계천의 환상궁합

by 즐풍 2023.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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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11. (목)  오후에 잠시 들림

 

 

경주 옥산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에 몰두하며 심신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9곳의 한국의 서원 중 한 곳이다.

경주에 하루 머무르는 동안 마석산, 양동마을에 이어 마지막으로 탐방하게 된다.

옥계서원은 자계천의 아름다움이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곳에서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지혜와 평화를 찾을 수 있다.

경주 옥산서원은 선비들의 지혜와 열정이 녹아든 곳으로,

옥산서원을 둘러보고 자계천에서 이곳의 풍광을 즐기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우리 역사의 깊이와 풍요를 느낄 수 있다.

 

 

 

ㅁ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은 1572년 경주지역 사림들이 이언적(1491~1553)의 깊은 학문과 올곧은 실천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듬해 1573년 선조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쪽으로 앉아있는 옥산서원은, 화개산(동), 자옥산(서), 도덕산(북)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트여있다.

앞에 흐르는 자계천의 너럭바위 ‘세심대’는 이황의 글씨로

‘맑은 물에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 했다.

정조는 이언적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초시’를 치렀다고 한다.


정문인 ‘역락문’에 들어서서 ‘무변루’로 가려면 좁은 도랑을 건너야 한다. 

자계천의 상류에서 서원의 북쪽 담장 아래로 끌어들인 물길이다.

이 도랑을 건너면 유식공간인 ‘무변루’. 한국의 서원 가운데 맨 처음으로 지은 누마루 건축물이다.

‘무변루’ 아래로 들어가 돌계단을 딛고 오르면, ‘무변루’와 ‘구인당’ 사이에 기숙사인 동·서재가 마주 보며

정사각형의 강학공간을 이룬다.

팔작지붕 아래 앞면 5칸 옆면 2칸의 ‘구인당’은, 바른층 쌓기의 돌 기단 위에 앉아있다.
강당인 ‘구인당’에서는 돋보이는 명필을 만날 수 있다.

처마아래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대청마루에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은 문신이자 명필로 알려진 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마루 안쪽의 ‘구인당’은 ‘무변루’와 함께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 뒤에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 ‘체인묘’가 있다.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마음을 실천에 옮긴다’라는 뜻으로, 이언적이 주장한 실천철학의 핵심이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오현’으로, 조선도학의 어른으로 받들어졌다.

 

‘옥산서원’은 1871년(고종 8년)의 서원철폐도 넘었지만, 

가까이 6.25 전쟁 격전지였던 ‘경주 안강전투’에 쏟아지던 포화도 피했다.
이로써 이 나라 출판과 장서의 중심서원으로서, 다양한 분야의 귀한 책을 온전하게 지켜올 수 있었다.
‘옥산서원’은 1871년(고종 8년)의 서원철폐도 넘었지만,

가까이 6.25 전쟁 격전지였던 ‘경주 안강전투’에 쏟아지던 포화도 피했다.

옥산서원은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과 ‘한국의 서원’(2019년)으로 세계유산 2관왕이다.

                                                                           (출처_(재)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홈피)

 

 

 

 

 회재(晦齋)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적(主理論的)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라 한 것은 주희의 호인 회암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퇴계에게 이어져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

회재에게 내려진 시호인 ‘문원(文元)’은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임을 적절하게 나타낸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의 모범으로서 우뚝 선 봉우리였다고

평가받는 김굉필 (金安例, 1454-1504),정여창(1450-1504), 조광조(1482-1519),이황(1501-1570)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들을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한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언적의 학설이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학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

선조 5년 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이 서원을 처음 세웠고,

이듬해에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유지되었던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이 서원은 초기 건축물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형식을 갖추었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강학 공간으로 무변루와 구인당, 동·서재가 있고,

구인당 뒤편에 제향 공간으로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가 있다.

동재 오른쪽의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아보던 곳이고 그 뒤편 건물은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현판의 글씨는 아계 이산해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 서원은 2010년 7월에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에는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유산에 다시 등재되었다.


* 사액서원 (賜額書院):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편액을 내릴 때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함께 하사하였다.
* 서원철폐령: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헐어 버린 일. 전국 650개 서원 중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등 47개의 서원만 남겨 놓았다.
*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곳의 서원은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안내문)

 

정문인 역락문은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며 문신으로 본래 이름은 적(迪)이었는데,

후에 중종의 명으로 언(彦) 자를 더 붙여 언적(彦迪)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는 설서,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 직제학, 전주 부윤, 이조·예조, 형조판, 경상도관찰사, 찬성 등을 역임했으며,

547년(명종 2)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江界)에 유배되어

그곳에 서 삶을 마감한다.

 

양재역은 당시 한양에서 남쪽으로 나가는 첫 번째 역이었다.

이 양재역의 벽에 문정왕후와 권신 이기 등을 비난하는 글이 발견되어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하였는데, 이 사건은 일당이 꾸며낸 사건이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역락문 아래 통로를 이용해 들어선 다음 무변루 1층 통로를 이용해 강학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무변루 건물이다.

무변루는 본래 납청루라 하였다가, 훗날 노수신이 주돈이에서 취하여 무변루’라고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의 각 1칸에는 보첨(補添) 형식을 하여

툇간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되어 계자 난간이 둘러져 있다.

가운데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와 판문을 달아 공간을 제한한 반면,

강당 쪽으로는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양 끝의 누마루에 서면 서원 쪽으로는 강당 앞마당이 처마 사이로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변루 아래층의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았고, 양측에는 위층 온돌방의 구들과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무변루는 외삼문에서 보면 2층이지만, 강당 쪽에서는 위층만 보인다.

무변루를 통해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의 안마당에 이르게 된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무변루는 쪽문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안쪽은 공간 트였다.

 

무변루를 들어오면 강학공간이 펼쳐진다.

구인당 앞 좌우의 동재(남재)와 서재(북재)는 강당인 구인당과 함께 강학공간을 이룬다.

강당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초익공을 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왼편인 남쪽방은 양진재이고 오른편인 북쪽방은 해립재이다.

건물들은 전면에 강학공간을, 후면에 제향공간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전학 후묘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앞마당에서 보는 무변루 2층

 

민구재 학생들 거주 공간

 

민구재와 암수재

 

서원에서 학생들은 기숙과 개인 학습을 병행하였다.

남계서원의 배치방식을 계승하여 강당의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민구재는 동재(東齋), 암수재는 서재(西齋)에 해당한다.

모양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一 "자형 평면이며, 평면구성은 좌측부터 마루 1칸, 방 2칸, 마루 1칸,

방 1칸으로 되어 있다. 암수재는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출처_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안내서)

 

암수재 스승의 거주 공간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자이다.

 

구인당 求仁堂

 

1839년(현종 5) • 크기: 84 × 182
옥산서원 강당 편액으로, '구인'은「논어, 「술이(述而)」편에서 인용한 말로,

성현의 학문이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것은 이언적 학문의 핵심 사상이기도 하다. 

노수신이 명명하고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현판 좌측에 노수신이 4언4구 형식으로 '구인'의 의미를 기록해 둔 것이 특이하다.
1839년(현종 5) 강당 화재의 손상된 것을 다시 복각하였다.
                                                                                           (출처_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안내서)

 

해입재

 

양진재

 

옥산서원 강당에서 보는 무변루

 

경각과 문집판각에는 각종 판각과 어서(御書)를 보관했는데, 전국 서원 중에서 보유 문적 수가 가장 많다.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원의 향사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있다.

봄 향사는 음력 2월 중정일, 가을 향사는 음력 8월 중정일에 지낸다.

체인묘의 ‘체인體仁 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써,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체인묘 주변에는 옥산서원이 사찰 터에 세웠음을 보이는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유형문화재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희재 이언적 1491~1553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 1577에 세운 신도비이다.

원래 옥산서원 앞 용추계곡에 있던 것을 서원 안으로 옮겼다.

이언적의 묘소 앞에도 1586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이언적은 16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람파 관료이다.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을 당하고 귀향하여 경주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복귀하였으나,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별세하였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선조 원년 1568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와 종묘에 배향되었다.


* 신도비(神道碑):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묘소 앞에 세운 비석
* 동방오현(東方五賢): 동방 즉, 우리나라 다섯 분의 매우 뛰어난 현인. 일두 정여창, 사용 김광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  (안내문)

 

 

 

 

 

 

 

무변루로 오르는 계단

 

 

옥산서원에서  제향을 지내는 방법

 

º 제향 전 간식으로 야하(夜下)를 제공하는 옥산서원


경북 경주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기리기 위하여 1572년(선조 5) 창건하였고,

1574년(선조 7) 사액을 받아 영남의 주목되는 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의 병화에도 피해 없이 보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이곳은 지역 지성들의 공론을 결집한 

곳이면서  교육과 더불어 제향자 후손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었다.
옥산서원의 춘추 향사는 새벽 1시경에 시작되기 때문에, 향사에 들어가기 전에 허기지지 말라고 

제관들에게 야하라는 미음 간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희생을 가자(架子)에 실어 운반할 때에 누각인 무변루와 강당, 사우까지 사다리를 설치해 두고

중문을 통해 옮기는 것도 특이하다.

 


º 물을 뿌리고 희생을 문지르는 재유사(齋有司)


옥산서원에서는 역락문 밖의 생단을 중심으로 현관이 희생의 남북향으로 서면, 재유사가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며 돼지의 상태를 살펴본 다음 끓어 앉아 희생을 문지르고 헌관을 향하여 '돌(腯)'을 고하면

현관은 '충(充)'으로 답한다.



º 사당 앞에서의 축문(祝文) 작성


옥산서원에서는 분정이 끝나면 대축이 사당 문을 열어둔 채 내상문 밖에서 축문을 작성한다.
축문 작성이 끝나면 헌관에게 확인을 받고 축문을 조그만 축상에 받쳐 들고 사당 제상 아래 향탁 좌측에 둔다.


º  희생 옮기기


옥산서원에서는 다른 서원과 달리 누각과 강당, 사우 중문에 이르기까지 사다리를 설치해 두고서 

희생을 가자에 실어 옮긴다.


º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 (奠弊禮)


옥산서원에서는 대축이 채반 모양의 폐비에 폐백을 담아 초헌관에게 주면, 초헌관은 폐백만 들어 올린다.
다른 서원에서는 폐백이 든 폐비채로 올린다.

                                                                                           (출처_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안내서)

 

 

옥산서원을 나서면 이 지역의 명소이자 서원의 주인인 유생들이 유식을 즐기는 장소인 자계천과 만난다.

사실 즐풍은 옥산서원보다 자계천의 풍광에 마음을 뺏긴다.

 

자계천은 용암이 흐르며 거대한 암반이 생긴 바위다.

 

 

 

암반의 한쪽은 용암이 마지막으로 흘러가며 약해진 부분이 침식되며 깊은 계곡이 생겼다.

계곡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직각으로 들어가며 물길을 냈다.

 

이곳 암반은 층층이 침식되며 계단 형식으로 생겨 더 멋지게 보인다.

 

 

 

 

서원이 주변 풍경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심신을 수양할 수 있는 곳을

찾았던 것이 중요한 이유다. 

서원이 주변 풍광이 좋은 곳에서 자연과 어울리도록 외부로 공간이 트인 누각을 지었다.

누각에서 선비들은 격렬한 논쟁도 하고 시회도 열며 풍류를 즐겼다.

긴장된 학문의 길에서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심신을 고양하는 유식(遊息) 공간인 셈이다.

유식이란 학문하는 긴장에서 벗어나 편안히 쉬고 즐기면서도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을 뜻 한다.

이러한 누각은 서원이 자연과 접하는 위치인 서원 진입부에 배치되었다.

                                                                                              (출처_전통 역사마을 양동)

 

 

자로 잰 듯 높이와 너비, 깊이가 일정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제법 잘 자란 나무는 한껏 가지를 바위까지 드리워 그늘을 만든다.

여름엔 피서객들 차지가 될 건 뻔한 사실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숲이 펼쳐진다.

 

바로 이런 숲이다.

텐트도 필요 없이 돗자리 깔고 아무 데나 앉아도 좋다.

 

 

 

다시 자계천으로 내려왔다.

 

이제 막 모내기를 시작한다고 논을 간 물이 개울로 들어오며 흙탕물이 됐다.

 

물이 뿌옇다고 해도 청정수로 변환시켜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물은 얕게 또는 깊게 흐르며 자계천의 풍취를 더한다.

 

계심대 바위가 좋은 의자가 되기도 한다.

 

 

 

 

 

옥산서원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은 이곳에 술상을 차리회 시회를 열며 

갖자 지은 시를 읊으며 세상을 논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풍취를 상상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다.

 

계곡물은 용추를 이루는 상, 중, 하 폭포가 계곡 바위에 부딪쳐 높은 소리를 내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 나간다.

서원은 이 일대의 세심대와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한다.

세심대는 너럭바위로서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출처_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안내서)

 

세심대 洗心臺
옥산서원과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 사이 너럭바위에 새겨진 각석으로,

'세심'은 계곡의 맑은 시냇물을 보면서 마음의 티끌을 깨끗이 씻으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세심대'는 이언적이 명명한 사산오대(四山五臺) 가운데 하나이며, 

정조 때 이곳 주변에서 지방 초시(初試)를 개최하기도 했다.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출처_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안내서)

 

 

 

 

자계천아 너는 무엇이냐?    /// 즐풍 ///


옥산서원의 자계천아
너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청명한 하늘과 이 땅을 잇는
은은한 물줄기여!

옥산서원의 자계천아
너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오백여 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흐르는 강물이여!

옥산서원의 자계천아
너는 어느 곳에 머무르는가
학자들의 지혜와 정신을 비춘
살아있는 거울이여!

옥산서원의 자계천아
너는 어느 곳에 속하는가
한국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빛나는 보석이여!

 

 

즐풍도 시간을 초월하여 시회에 발을 딛고 시 한 수 읊으며 옥산서원을 매듭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