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결혼식이 열려 활기를 띤 전주향교

by 즐풍 2022. 11. 11.

2022_199

 

 

 

2022.10.1 (토)  오후에 탐방

 

 

전주 오목대를 둘러본 후 가까운 전주향교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하루에 전주시를 다 돌 수는 없지만 전주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경기전, 오목대, 전라감영, 풍남루, 전주향교까지

이어지는 구간만 놓고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만나는 시간인 셈이다.

게다가 1931년에 준공된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이곳의 특별함을 더한다.

 

전국의 많은 고도(古都) 중에 외부와 단절된 한옥마을은 낙안읍성과 해미읍성일 것이다.

이들은 읍성이란 물리적 테두리 안에서 재산권의 많은 제약을 받으며 과거의 문화 자산을 지켜가고 있다.

이와 달리 전주나 경주 등 일부 도시에 남아 있는 한옥마을은 테두리가 불분명할 만큼 지역과 공존한다.

오목대를 지나며 전주 한옥마을을 벗어나긴 했어도 전주향교로 가는 길엔 여전히 한옥이 즐비하다.

 

 

□ 전주향교(全州鄕校)

 

全州鄕校는 고려 공민왕 3년(서기 1354년) 풍남동 경기전 북편에 건립되었다가 

조선 태종 10년(서기 1410년)에 태조 영정을 봉안할 경기전(慶基殿) 건립으로 부(府) 서쪽 화산동으로 옮겨졌다. 

약 139년 후 성내에서 거리가 멀고 전주천을 넘나들기가 불편하고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 

우측에 사직단이 자리하여야 한다는 고제에 의하여 선조 36년(서기 1603년) 관찰사 장만의 상계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재이건하였다.

유서 깊은 전주향교는 유학의 정신문화를 계도할 인재양성을 위한 학문 수련의 요람이며 대성전에는 만세 종사이신 

孔夫子를 정위로 모시고,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중앙에, 그 외 아국 18현을 동서벽에, 공문십철, 송조육현과 

중국의 7현 등 23위의 유현을 동서무에 설위하였다.

계성사에는  오성의 고위를 모셔 총 51위의 선현 성현을 모시고 있는 대설위의 문묘로서 춘추로 석전을 

경건하게 봉행하는 전당으로 유림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거점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어느 때 보다도 올바른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요청되는 이때 우리의 전통윤리와 도덕을 

난국 극복의 바탕으로 삼아, 밝고 건전한 사회 기풍을 조성하기 위하여 보호 중심으로서 유지하여오던 문화재를 

개방 중심으로 바꿔 향교의 문을 활짝 열고 시민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 왔다.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지방문화 공간의 활용의 의미를 높이고, 시민의 윤리 도덕성 회복과 지방문화의 활성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유교정신에 입각하여 도의의 천명(闡明)과 윤리의 부식(扶植)을 실천하여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대도를 선양하고 범민퇴속(凡民頹俗)을 순화하며, 문묘 유지와 문화재 사적지로서 

길이 보호 관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출처_전주향교)

 

전주향교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이 만화루를 들어가야 한다.

 

내삼문인 일월문

 

만화루에 올라가 주변을 조망해 본다.

 

대성전

전면 3간 측면 3간 겹처마 맞배지붕에 일익공 형식이다(93.2㎥)

공자, 안자, 증자, 자은, 맹자 등 5위 봉안, 동벽 서벽에 우리나라 18현 봉안

 

내삼문으로 들어오니 오른쪽 동무엔 잔치상이 벌어졌다.

오늘 이곳에서 결혼식이 치러진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전주향교가 세워진 후 조선 초기에 경기전이 남쪽에 건립되었다.

경기전이 세워지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회초리 소리 때문에

"태조의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외곽으로 이사를 갔다가 성안의 양반 자재들은 거리가 멀고

개울을 건너 다니기 불편해 최종적으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이젠 고풍스러운 전주향교에서 결혼식까지 열리니 결혼 당사자에겐 남다른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대성전 뒤 담장 밖으로 보는 명륜당의 모습

 

다시 한 칸 안쪽으로 들어오니 서재인 이곳엔 결혼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 있다.

즐풍도 이쪽에 마련된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결혼식이 준비를 지켜본다.

 

명륜당은 당시 중학 과정을 학동을 교육하던 국립 교육과정이었다.

지금은 일요학교와 인성교육 전통문화학교를 개설하여 교육 중이며, 각종 행사와 유림의 제후 행사장으로 스이고 있다.

이런 명륜당에서 결혼식을 거행된다니 무척이라 색다른 경험이겠다.

 

요즘 결혼의 각자 개성에 맞게 야외 잔디밭이나 이렇게 고풍스러운 장소를 많이 이용한다.

날이 좋은 날은 예식장 잡기도 어려운 데다, 예식장이 많이 사라져 예식장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장소라면 하객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유림의 경전인 이런 향교의 그것도 명륜당 앞에서 결혼하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아는 사람으로 기억될 테니

그야말로 평생토록 서로를 사랑하며 백년해로하겠다.

 

 

 

그들의 분주한 결혼 준비와 상관없이 향교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제주도와 함께 유일하게 대성전 5성현의 고위를 모시고 석전대제 직전에 사제를 봉행하고 있는 계성사

 

명륜당을 물러나와 다시 대성전 구역으로 들어서며 앞서 본 서무 앞 동무다.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상

 

서무 앞 향나무

 

 

 

서무 건물의 긴 회랑

 

외삼문을 빠져나오며 전주향교 탐방을 마친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서 만든 공립학교다.

유교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으로 현재의 중·고등 교육과정이라 생각한다.

반면,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으로 일정 궤도에 오른 양반 자제들이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향교는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