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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야심을 드러낸 전주 오목대

by 즐풍 2022. 11. 6.

 

 

 

2022.10.1 (토) 오전에 잠시 탐방

 

 

전주 한옥마을과 경기전, 최명희 문학관, 전동성당 등을 탐방 후 오목대에 도착했다.

사실 오목대가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인지 모르고 들어섰다.

오목대는 작은 동산 정상에 있는 전통 누각이다.

 

 

 

□ 오목대 이목대(梧木臺 梨木臺)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잔치를 벌인 곳이다. 

잔치에서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보였고, 

이를 눈치챈 정몽주가 남고산성의 만경대에서 고려를 걱정하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발산(鉢山) 자락에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실의 뿌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1900년에 고종황제의 친필을 새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비를 오목대에,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비를 이목대에 세웠다. 

이목대 비각은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지 안내문)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 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출처_문화재청)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 비각

 

 

 

 

 

 

한 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며 고려를 엎으려는 생각을 정몽주는 진작에 눈치챘겠다.

더군다나 오목대에 함께 있을 때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로 스러져가는 고려를 비웃는다.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는구나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해내혜귀고향      내 위력이 세계만방에 더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누나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용맹한 인물을 얻어 온 사방을 지키리라

 

이 대풍가 노래를 부르는 이성계를 보며 정몽주는 나라의 주인이 바뀌겠다는 걸 직감한다.

정몽주는 이곳과 가까운 곳의 남고산성을 둘러보며 만경대에 고려를 걱정하며 쓴 시가 전해진다. 

 

남고산성 만경대의 안내문에 정몽주의 시가 있어 함께 올린다.

 

 

 

 

 

오목대 누각

 

사실 오목대는 이 건물과 고종황제의 친필인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비와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이 전부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성계의 새로운 왕조를 열겠다는 포부를 알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진다.

 

오목대 탐방을 끝내고 전주향교로 가기 위해 발길을 옮긴다.

 

 

 

 

이성계는 위화도를 회군하기 8년 전인 1380년 전남 남원 운봉의 화산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본향인 전주에 들러 한나라 고조인 유방의 대풍가를 부르며 새나라를 만들 꿈을 내비친다.

지금 같으면 정보기관에서 이런 내용을 최고 통치자에게 알리겠지만 당시엔 시스템이 부족했나 보다.

정몽주가 어지러운 시국을 시로 한탄해 보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나라를 이양받는 형식을 통한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른다.